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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매 맺는 기쁨 Mar 09. 2022

본질과 실존

느린 독서회 파이널 에세이: 이제 몸을 챙깁니다. by 문요한


나는 오랫동안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려왔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밝혀 냄으로써 나를 좀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정말이지 내가 왜 이렇게 세상에서 겉도는지, 이런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런 나의 삶은 대체 무슨 의미인지 간절히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구냐는 질문의 답을 거듭하고 거듭하면 결국 도달할 것만 같은 생의 '본질'에 골몰하며 사는 종류의 사람이 되었다. 나는 껍데기가 아닌, 그 속에 든 알맹이에 진짜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본질은 사람들이 '영적'이라고 분류한 것에 있다고 여겼기에, 나에게 이것의 극단에 자리한 물질적인 세계는 가볍고 천한 것이었다.


나의 이런 삶의 태도나 특성은 현실에서 벗어나 끝없는 상상의 세계로 침점하는 모계 혈통의 전통과 의심이나 질문 없이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의 이분법적 세계관, 그리고 추구하여도 좀처럼 얻을 수 없었던 물질적 만족에 대한 체념에 토대한 것이었다.


의식적으로는 물질에서 유리된 채 사는 나는 외롭고 고독했으나, 한편으로는 내 영혼이 세속인은 절대 닿을 수 없는, 진실의 언저리에 맴돌고 있다는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나는 내가 영혼에 관해서 만큼은 귀족적이고 우아하다 믿으며 내 빈궁을 위로했다.


나는 표면적인 삶에 매달려 외양만 그럴싸한 사람들은 시시하다 여기고 그런 낌새가 보일라치면, 일단 선을 그었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들을 말이 없었다.


나는 이 '본질', '영적 가치'에 기반한 삶을 살았다. 나는 학교생활을 할 때도, 직장을 구할 때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릴 때도, 보이지 않으나 가치 있다고 여기는 삶에 우선하며 살았다.

나는 신념대로 살기 위해서 간단히 내 몸을 혹사시켰고, 내 안의 감정과 욕망에 잔인하게 굴었다.

내게는 쉬운 선택이었다. 나는 현재보다 미래가, 삶보다는 죽음 이후가 더 중요하다 여겼기에.


그런데, 내 삶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였다. 보이지 않는 '본질'을 추구하며 살던 나는 아이의 보호자라는 실존적 과제에 당황하였다. 아이는 끊임없이 내게 '저기'가 아니라 '여기'에 있기를 요구했다. 나는 그러니까 내 몸은, 내 감정과 욕망은 모른척할 수 있었지만, 아이의 것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 아이를 더 사랑했고, 보잘것없는 내가 그의 세계이고, 우주임을 알았다. 내가 그의 창조자였고 그의 먹이이며, 그의 환상이었다. 아이는 나 없이는 생존할 수가 없었다.


아! 나의 이상의 세계에서의 어미는 완벽하고 아름다웠으나, 나의 현실은 부끄러울 정도로 척박하고 암담했다.

나는 두 아이에게 나의 온 정성을 쏟고 싶어서 가정 보육했으나, 감정 조절을 못해 사소한 것으로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내가 육아에 애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애쓰는 바람에 잘 먹지 못하고 자지 않아서 풀썩 쓰러지는 것을 남편이 겨우 붙들 정도로 나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때 나는 내 팔과 다리에 힘이 풀려 의지에 상관없이 휘청이는 것에 적잖이 놀랐었다.


비단 육아에서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출산 후 전반적인 나의 삶 전체가 그러했다.


나는 절제하는 우아한 삶을 살고 싶었으나, 택도 때지 않은 싸구려 새 옷들 옷장에 켜켜이 쌓여갔고, 육퇴 후엔 인터넷 서핑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나는 단정한 사람이 되기를 참으로 소망했으나 집 안 창고에는 하! 쓰레기, 쓰레기, 쓰레기!


나는 내 이상과 삶의 이 끔찍한 간격을 좁힐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로웠다. 나의 의도대로 창조한 머릿속 세계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했는데, 나의 실제는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이 괴리 앞에 심한 자괴감을 느꼈다.


그런데, 최근에야 나는 정말로 오랫동안 삶을 오해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본질'에 지나치게 진지하고 열정적이어서, 현실에는 너무나 가볍고 게을렀음을, 나의 실제를 이루는 나의 몸, 나의 공간, 나의 가족, 나의 커리어, 나의 돈에 너무 무심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가 천하다 여긴 물질의 세계에 지금 내가 발 딛고 살고 있음을, 여기가 내 삶의 뿌리임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생의 본질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 순간'이었다.

어쩌면, 내가 천박하다 여겼던 물질의 세계가 진실의 통로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겉치레를 한다고 여겼던 이들이 나보다 삶의 본질에 더 닿아있을지도 모를 것이었다.


만약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잘 어울리는 색상의 부드러운 소재의 옷을 신중하게 골라 입는다면, 만약 내 몸의 편안한 감각을 위해 달리고 헤엄치고 자전거를 구른다면, 만약 공간에 있는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내가 가장 나다울 수 있게 집을 가꾼다면, 그게 바로 생의 기도이고 찬미이며 경전일 수 있음을, 나는 어린아이가 세상을 배우듯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머리로는 알게 된 이것을 몸으로는 실천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내 머리는 항상 빠르게 돌아가지만, 몸은 굼떴다. 나는 감각을 느낀다는 것이, 나의 몸을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모호하고 어렵게 느껴졌다.



'이제 몸을 챙깁니다.'라는 저서에서 작가 문요한은 내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


"머리로 자기를 이해하고 세상을 살아가면 혼란스럽지만, 몸을 잘 느끼고 살아가면 삶은 보다 간결해집니다."

"고요한 마음, 좋은 관계, 행복한 삶, 그리고 아름다운 영혼 역시 모두 몸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몸을 초월해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뿌리를 두어야 지속 가능합니다. 몸을 배제한 삶은 뿌리 없는 식물과 같습니다. 영양분을 빨아들일 수 없으며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이런 해법을 제시한다.


"결국 몸을 챙기는 것은 마음을 챙기는 것이고, 삶을 챙기는 것이 됩니다. 심리 치료사이자 요가 지도자인 스티븐 코프(Stephen Cope)는 자신의 저서 [요가, 그리고 진정한 자기를 찾기 위한 탐구(Yoga and the Quest for the True Self)]에서 몸과 마음의 연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 우리 몸과의 본능적인 연결이 다시 이루어지고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을 열심히 사랑할 줄 아는 새로운 능력이 생긴다.

자기 몸을 돌보는 진정성 수준이 달라지면 건강 생태와 식생활, 몸의 에너지, 시간 관리 방식에 대한 관심도 달라지고 재설정된다. 자신을 더욱 잘 돌보게 만드는 이 변화는 '그래야만 한다'라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자신을 돌볼 때 찾아오는 즉각적이고 본질적인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나는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작가에게 조금 토라졌었다. 그가 '몸'의 세상에 둔한 나를 타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나의 치부를 들킨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이내, 내가 그의 진실한 메시지를 왜곡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하는 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 제 몸을 돌보지 못하던 저는 자발적 안식년을 보내면서, 여행을 하다가 머리가 잠잠해지고, 몸이 깨어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저는 연구를 하며, 몸을 챙기면 마음이 치유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내가 알게 된 것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 이제 몸을 챙깁시다."


그래도 몸을 챙기는 것이 내게는 너무 어렵다며 불평할라 치니, 그가 선수를 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혁명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변화입니다. 몸을 느끼지 못하고 생활하다가도 한 번씩 몸에 주의를 기울여 몸을 느끼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몸을 돌보는 것입니다."


작가의 말처럼 몸과 마음이 연결되고,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자기 자신을 열심히 사랑할 줄 아는 새로운 능력이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본질적인 기쁨을 누릴 것이다.


나는 수용적인 태도로 현재 경험을 자각하며 몸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는, 지금- 여기에 실존하는 깨끗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의 고유한 생체리듬을 회복하고 감정과 욕망으로 이야기하는 나의 몸에 다정히 대함으로, 환상과 삶의 괴리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를 온전히 누리고 싶다.


분명히, 나는 깨달으나 언제나 그렇듯 이미 알던 익숙한 세계로 후퇴할 것이다. 나는 절망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작은 하루와 이 작은 깨달음이 결국 내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본질로 나를 이끌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나는 나를 이해시키고 설득시킬 필요 없이 우주가 내게 열어준 온 감각으로 내가 누구인지 느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내게 주어진 이 생에서 충만할 것이다.


나는 지금 욕심내지 않고, 방금 세상에 태어난 아기가 서투른 첫 숨을 내쉬듯 폐를 부풀려 숨을 내뱉는다.

나는 드디어 나에게 귀를 기울인다. 나의 목을 메우는 숨의 소리가 아기가 우는 듯 서럽고 희망차다.


아! 이것이 바로 실존이구나!



아난다 아카데미에서 엄마들이 모여, 본질과 실존의 균형을 찾아 한 달간 진하게 책을 읽고 삶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이번 모임을 통해 현실의 불행에 익숙해져 행복을 느끼는 감각이 마비되었음을, 반복되는 소외감과 배신감으로 물질세계를 평가 절하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숨을 쉬는 것도, 내장의 감각을 느끼는 것도, 감정에 대한 몸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도 제게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만, 본질이 주는 이런 기쁨과 실존이 주는 저런 기쁨 모두 느껴보고 싶다는 갈망이 제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보니,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나 봅니다.


저는 이렇게 깊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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