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의 불편함
마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 장편소설 그날 저녁의 불편함 서평
'머리커 뤼카스 레이네펠트'는 '그날 저녁의 불편함'이라는 소설을 통해 밀도 있는 글로 최대한의 정서와 상징을 압축하여 죽음과 남은 자들의 고통을 아주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독자들은 흉측한 죽음과 애써 달래놓은 고통 자체가 되기에 괴롭고 아프다.
오빠 맛히스가 죽은 후 열 살 소녀 야스는 자신이 간직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잃지 않기 위해(p.44) 코트를 벗지 않고 똥을 누지 않는다. 그녀는 상실이 두려워 자연의 원리를 거부함으로 운명에 항거한다. 그녀는 특히 부모의 상실, 동생 하나의 상실, 자기 자신에의 상실이 두렵다.
소녀는 왜 영웅은 우리 마음에서만 영원할 수 있는 것인가?(p.37), 이렇게 떠나는 것이 옳은 방식이냐?(p.41) 물으며, 삶이 이상적이지 않은, 허점 투성이에, 정의롭지 않음을 폭로한다. 운명은 잔인하다. 소중한 것을 잃어야만 하는 이 삶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도, 무엇이든 죽여서 먹으며 살아가야 하는 이 삶의 근원이 참으로 잔인하다. 소녀의 폭력적인 묘사를 통해 죽음과 고통이라는 운명의 그 서슬 퍼런 모습을 독자에게 드러낸다.
우리는 오빠의 죽음을 대하는 가족들의 애도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소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곧잘 숨긴다. 할머니가 물으면 빙그레 웃고, 엄마에게는 충분히 행복하다고 말한다. 타인의 감정과 욕구에 민감한 소녀는 결코 자신의 불안과 슬픔을 표현할 수가 없다.
소녀는 오빠의 상실의 아픔을 떠나간 이틀간의 크리스마스의 공허로 대체하여 생생히 느끼는데, 이것은 신의 상실, 구체적인 삶의 상실을 의미한다.
소녀는 오빠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그래서 와해된 가정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그녀는 코트를 벗지 않고, 배변을 참고, 배에 압정을 꼽고, 닭을 죽이고, 두꺼비를 억지로 교배시킴으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녀는 결코 운명은 통제할 수 없기에 그녀는 죽음으로 그것에 대항한다.
그의 부모는 이것이 자신들의 죄에 대한 신의 뜻(재앙)이기 때문에 충분히 슬퍼하지 못한다. 아들의 죽음을 서로의 탓으로 돌리며 부부는 서로에게 멀어진다.
엄마는 큰 아이의 죽음에 남은 아이들을 등지고서만,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히 울었다(p. 68). 엄마는 먹지 않음으로 아이를 잃은 자신을 벌하면서도, 남은 아이들에게 너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며 윽박지르며 죽음을 그 아이의 책임으로 돌리며 자신을 위로한다. 엄마는 다시 겪을 상실이 두려워, 남은 아이들을 냉담한 태도로 대함으로 소중한 이와의 친밀감을 회피한다.
아빠는 우리가 뭘 했기에 이런 꼴을 당해야 하냐며(p.226), 이 모든 것이 목사들 때문이 아니냐며 다지지만, 신과 신앙 공동체를 떠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던 삶을 그대로 살아감으로 운명에 순종한다. 반면 가정에서는 그가 믿는 신처럼 그는 무신경하고 고압적이며 그가 했던 것과 같은 정서에의 억압을 가족에게 요구한다.
오빠는 폭력과 반항으로, 동생은 조용한 회피로(p.35...그래도 아무 대답도 없자 걔는 인형을 가지고 놀러 소파 뒤로 돌아갔다. 하나의 가느다란 몸이 잠자리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 반응한다.
그들의 종교는 이 가족의 구원에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종교는 내세와 부활을 이야기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사실이 맛히스의 죽음에 대한 가족의 애도를 방해한다.
이 소설에서의 중교는 규율과 규칙이다. 질문 없이 지키고 따라야 하는 것이기에 선선한 깨달음이나 위안을 얻을 수 없다. 여기에서 종교는 인간이 삶에 항거하지 못하지 못하게 만드는 억압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작용한다. 운명에 순종하도록 억압당하여 적절히 위로받지 못한 이들은 이중 족쇄에 갇혀 슬픔에의 절망감과 켜켜이 쌓이는 삶에 대한 무력해진다.
야스는 "만약 아빠가 새 가족을 꾸린다면, 그 가족은 아빠에게 말대답을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가끔 신을 의심하듯, 그 가족의 누군가가 아빠를 감히 의심하고 도전하기를 바란다."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소녀를 통해 우리가 삶에서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그리워하고(p. 161), 이 부조리한 삶에 의심하고 도전하기를 바란다.
소설속 종교의 살패에 반해, 소녀 야스는 인류의 죄를 대속한 예수그리스도처럼 어떻게든 이 죽음과 고통(p.201배속을 죄어오는 불쾌감)으로부터 헤엄쳐 나와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를 대신하여 소설 속에서 죽는다.
그녀의 선택이 죽음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죽음뿐이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오히려 그녀는 미처 해결하지 못한 우리의 고통을 꺼낼 수 있게 죽음과 불안에 충분히 슬퍼할 수 있게 함으로, 그것에 방점을 찍어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돌려세우고 다시 삶을 살아가게 한다. ("나에게도 양면이 있다. 나는 히틀러이기도 하고 유대인이기도 하다. 선하면서 악한 존재인 것이다" p. 308) 삶의 부조리함에서도 우리는 살아야 하기에, 살아내는 그것이 바로 진짜 삶이기에.
나는 이 소설을 통해, 나의 명백한 절망과 고통에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했는가 질문하게 되었다. 나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내 삶의 해악과 삶의 불공정성에 어떻게 반응했던가? 나는 이것을 충분히 직시하고 슬퍼했던가?, 절망에 빠진 그것은 삶이 아니라며 나를 닦달하진 않았던가?, 쉬운 위로를 찾아 나 안의 감정을 모르는 채 하지는 않았던가?, 나는 삶의 집착하느라, 나를 철저히 오랫동안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왜 이런 부모에게서 태어나 이런 가정에서 자랐던 것일까?
우크라이나 아이들은, 시리아 아이들은, 수많은 분쟁지역의 아이들은,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은 왜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 걸까? 왜 진실은 외면당할까? 왜 자격 없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는 걸까? 왜 부와 권력은 소수에게 독점되고 대물림되는 걸까?
삶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 것일까? 충분히 슬퍼하고 애도하자. 삶은 불공평하다. 삶은 잔인하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야겠다. 의심하고, 질문 하고, 답을 찾으며 최대한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