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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ul 20. 2024

철가면을 쓴 소녀




살아오면서 스스로의 몸을 사랑해주지 못하고 혐오하는 순간이 너무 많았다. 지난 날 내 마음에 불안과 두려움이 많았던 까닭 중 하나는 내가 내 자신의 몸과 화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남들 눈에 '이상할지도' 모르는다는 두려움, 보기 싫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외면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내 '몸'에서 시작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의 피부는 얇아지고 얇아져서 작은 것 하나에도 얼마나 쓰라렸던가.


나에게 불안감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신체 기관 중 하나는 바로 나의 '그 곳'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스무살이 넘어서도 나의 '그 곳'을 단 한 번도 직접 내 눈으로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외부로 나와있는 남성의 생식기와 다르게, 여성의 생식기는 거울로 직접 들여다보지 않으면 살아가면서 사실 크게 볼 일이 많지 않다. 그럼에도 내가 단 한번도 내 '그 곳'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는 '두려웠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지 않고 늘 감각으로만 존재를 느끼는 나의 신체기관이 행여나 '불량'은 아닐까, '비정상'은 아닐까, '괴물'처럼 추한 모습인 걸 아닐까 무서웠다.


게다가 학창시절 때, 여성의 자세한 생식기의 모습에 대해서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AV같은 영상도 본적 없던 나는 (기껏해야 교과서에서는 여성의 나팔관이나 난소, 질 정도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이었지 클리토리스의 위치나 소음순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니더라도 여성의 생식기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2학년 때 교양수업으로 우연히 듣게된 연극 과목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라는 연극을 알게 되었다.


버자이너 모놀로그의 우리말은 '보지의 독백'이며, 여성들이 차마 '그곳', '아래', '거기'라고만 부를 수 밖에 없는 곳에 대하여 말그대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 체험을 독백하는 연극이다. 교수님이 보여주는 짧은 연극 영상은 내게 꽤나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나는 연극의 바탕이 된 책을 직접 사서 읽게 되기까지 했다. 그 책속에서 '보지'라는 단어를 무수히 많이 보았고, '보지'란 내가 느끼는 것처럼 '읍습하고 축축하고 어쩐기 기분나쁜 ' 그런 곳이 아니라는 활자를 계속 읽었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그곳을 들여다볼 용기를 얻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건 마치 철가면을 쓴 채로 감금을 당한 어떤 자가, 20여년간 자신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철가면을 벗은 자신의 얼굴을 봐야하는 느낌이었다. 20여년 간 가면 아래에서 변형되고 뒤틀리고 썩어있을지도 모르는 얼굴을 마주하는 일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 그 곳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염원이 내 깊숙히 자리잡았고,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어느날 느닷없이 나는 내 그곳을 한 번 꼭 봐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얻어 나의 그곳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행위를 통해 해방감을 얻게 되었느냐? 아니었다.

'그 곳'의 생김새 중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어떤 것인지 인터넷으로 계속 검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기는 남성의 성기와 마찬가지로, 그 생김새가 사람의 수만큼 다양하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그곳의 다양한 생김새를 모아서 조각을한 예술가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어떤 모습이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을텐데도 나는 '이상적인 몸', '이상적인 신체기관'에 대한 강박을 여전히 버리기가 어려웠다.


안타깝게도 나는 여전히 그 이후로도 내 그곳을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다양성'에 대한 가치와 소중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내 몸에까지 적용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나 또한 다양한 사람 중에 하나이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에 나를 맞출 필요가 없는데도, 계속 스스로와 그 '이상'의 간격 사이의 거리를 끊임없이 재는 것이다.

  '이상'이란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 '이상'에 자꾸만 속하고 싶은 욕심을, 이상에 속해서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싶은 저열한 욕망을 느낄 떄가 있다. 그 욕심와 욕망을 다스리는 일이 왜 이리도 어려운지.


철가면을 썼던 소녀가 철가면을 벗고 자신의 얼굴을 보게되기까지 20여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철가면을 벗은 그 얼굴을 혐오하지 않고 사랑해주기까지는 또 얼마나의 시간이 걸릴까.  

앞으로 나는 내 몸을 더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내 '그 곳'은 만약 출산을 하게 되면 더욱 더 '이상'과 멀어질 것이고 나의 육체는 시간이 흐르며 계속 노화될테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내 몸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싶다. 그것이 아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지난한 일이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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