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비누 공유 연맹 45

by 인디캣

어쩌면 좋은 방법이 있을 지도 몰라.


자기 자신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것 말고도 뭔가 수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A의 말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A는 오랫동안 정신적인 문제에 시달려왔고 게임과 책으로 문제를 회피하려고 노력해봤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A는 최근에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읽다가 오랫동안 책을 읽는 걸 그만둔 상태였다. '존재와 무'는 실존주의 철학이 담겼다고 하는데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 68혁명 때 젊은이들이 시위에 나섰을 때 품안에 '존재와 무'를 안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고 시장의 상인들이 '존재와 무'가 딱 1kg이라는 것을 이용해 저울 추를 맞추는 데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어느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만큼 두껍고 저울추를 맞추는 용도 외에는 실용적인 용도가 없었다. 번역된 책은 더욱 두꺼워져서 갖고 다니기가 힘들 정도였고 누워서 읽으면 팔이 아파서 오래 읽는 건 힘들었다.

책을 읽는 건 답이 아니다. 하지만 어딘가에는 답이 있을 것이다.


읽는 책을 바꿔보면 어때. 아니면 다른 언어를 배워봐. 한국어로 나오는 책들이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일본어도 상당한 문제야. 중국어도 마찬가지고. 독일어가 괜찮을 것 같아. 러시아어는 어때. 요즘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이 있나? 글쎄 서문학과는 언제나 인기가 없었으니까. 러시아와 별다른 교류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러시아가 벌이는 전쟁 한가운데 있는 A는 사실상 러시아어를 배우기에는 최적의 환경에 있다. 나는 A에게 그렇게 말해봤지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다른 국가야라는 말이 돌아올 뿐이었다. 사실 슬라브 계열 국가들은 과거에 대부분 러시아 영토였거나 러시아 민족들이 너무 많이 살고 있어서 한국 사람 입장에서 보면 러시아와 크게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심심하면 미사일이 날아와서 고층 빌딩들이 부서지는 나라가 됐고 그곳에서도 여전히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은 있었다. 스팀이 생긴 이후로는 어떤 나라든지 영어로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면 전세계적인 히트를 칠 가능성이 있다. A도 결국 그런 글로벌한 산업 한귀퉁이에 어떻게든 낑겨들어간 셈이었다.


A는 자신이 언제든 일을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산다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둘 수 없는 인생이라면 떠나가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A가 걸린 병은 자살율이 높고 특히나 치명적인 방법으로 자살하는 비율이 높았다. 이런 병에 걸린 것도 다 예정된 흐름이라고 A는 느끼고 있었다.


이 흐름에서 벗어날 마땅한 방법은 없다.


그러면 죽는 게 수일까? 하지만 이제 와서 죽는 건 너무 통계적이잖아. 통계 수치 속의 뻔한 죽음이 되기에는 안타까운 것들이 너무 많다고 A는 애써 미련을 가지려고 해봤다. A가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건 음악, 공연, 페스티벌, 홍콩, 일본 그런 것들이었다.


아직 읽지 못한 김초엽의 신간, 박참새의 논픽션. 읽다가 만 존재와 무. 어떤 문학상을 받았다는 누군가의 또 다른 소설 나부랭이들. A는 내게 6시에 약을 먹어 8시에 잠에 들었다가 다음날 6시에 눈을 뜨는 일을 반복한다고 말했다. 거의 1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잠을 자는 것이다.


장강명도 천재고 김초엽도 천재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천재들 뿐이군.


A는 조금씩 자신의 삶이 박탈되고 있다고, 꿈 속에서 뭔가 음모를 꾸몄다가 현실 속에서 비틀거리며 걸어갈 뿐이라는 생각을 반복한다고 털어놨다. 나는 A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반복. 살아간다는 것의 반복을 즐길 뿐이었다.


쉬고 일하고 자고 깨어나고. A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 뿐이다. 깨어있는 시간 속에서는 뭔가 다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지만 정작 손안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다. A는 무기력한 인간이다. 하지만 무가치한 인간이라고까지는 할 수가 없다. 뭔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해나간다는 것.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정도의 생각일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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