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 비누 공유 연맹 46

by 인디캣

인스타그램을 내리다가 이런 글을 보게 됐다.


혹시 제 소설을 읽어주실 수 있나요?


내 대답은 싫다네.


영 아닌 소재는 없네. 내용만 진실된다면.


또 문장이 간결하고 꾸밈없다면.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용기와 품위를 잃지 않는다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이 헤밍웨이에게 자신이 쓴 소설을 읽어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다. 헤밍웨이는 주인공의 글이 잘 썼으면 질투나서 싫고 못 썼으면 못 써서 싫다고 답한다.


헤밍웨이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 영화를 만든 우디 앨런 말이다.


그러나 진실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사실 그대로라는 뜻일까. 아니면 작가 자신이 거짓으로 자신을 꾸며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소설에 투영했다는 뜻일까. 아마 후자가 아닐까.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것은 에세이지 픽션이 아니다. 픽션은 그럴듯한 이야기일 뿐이다. 너무 그럴듯한 이야기는 사실 자체에 맞닿아 있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A는 자신이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쓴다면서도 사실을 그대로 적은 적이 많다며 자신은 소설가가 될 재능이 없다고 내게 말했다. 나 또한 내심 소설가 행세를 하면서 에세이를 써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A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다고, 요즘 '오토 픽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다른 사람의 경험과 관계를 소설화하는 일들이 빈번하다는 것에 대해 문제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하고 일어난 일을 마음대로 소설에 쓰는 사람은 소설가가 아니라 일종의 도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A는 내게 말했다. A는 그렇다면 자신은 심각한 도벽이 있는 게 맞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손에서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양 써왔는가 하며 '재현의 윤리'에 대해 자신은 할 말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A가 비윤리적으로 글을 써왔다고 해서 나까지 죄를 털어놔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A는 A대로의 인생을 살아온 것이고 그만큼의 죄를 지어왔을 것이다. 나의 죄는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 A의 죄에 덤터기까지 써서 두배로 세배로 책임질 필요까지야 없다.


A가 좋아하던 밴드가 활동 종료를 예고하고, A는 우울감이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A의 우울감은 병적인 것이기 때문에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또 다른 종류의 조증 삽화로 이어질 수도 있고 조증이 혼재된 우울증 상태에서는 자살 확률이 높아지기도 했다.


사실 A는 자살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더이상 책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도 그렇고 글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황도 자살의 명분이 되기에 충분했다. A는 활동 종료를 예고한 밴드 때문에 일본에 처음 갔다. 그게 A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는 해외 여행이기도 했다.


날이 추운 삿포로는 폭설이 내렸고 시샤모를 보러온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속에서도 줄을 서 입장을 기다렸다. A는 시샤모를 보고 나서 곧바로 한국에 왔지만 부족한 느낌은 없었다. 오랫동안 좋아했던 일본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만감이 상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다. A는 곧 다른 밴드를 좋아하게 됐고 모국에서 그 밴드의 공연을 보고, 기억을 잃고, 범죄를 저지르고, 미친 사람이 돼 거리를 헤매고,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이제는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사실 A의 인생은 모국에서 감옥에 수감된 이래 한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A의 인생은 변하지 않고 있다. 죽음이라는 다음 스텝을 밟기 두려운 나머지 현실에서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게 잘못일까.


죽지 않고 있는 게 실수는 아닐까.


살아간다는 게 거대한 실수일까.


A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결정에 대해 미뤄놓기를 계속했다. 이것을 선택하는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A의 머릿속에는 명확한 플랜이 없는 일이었다. A가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이 미쳤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하는 모든 선택이 병적이라는 것. 이 두가지 뿐이었다.


헤밍웨이의 말을 빌려 우디 앨런은 말하지 않았는가. 역경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말라고. 우디 앨런의 역경이란 자신이 입양한 여자애와 결혼한 것. 그리고 그가 지독한 페도필리아라는 사실. 페도필리아는 질병이나 마찬가지인 취향이었다. 그가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은 단지 우디 앨런의 현재 아내 순이가 그를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의 전부인은 우디 앨런이 페도필리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고 언론을 통해서 주기적으로 고발하고 있었다.


미아 패로는 전부인이 아니라 사실혼 관계에 불과하다고? 그것은 논쟁을 위한 논쟁거리일뿐. 우디 앨런에게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위대한 영화 거장이고 그 사실 또한 변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 우디 앨런에게 그의 병적인 취향에 대해 언급하면서 치료를 권했더라면 자신의 수양딸과 결혼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디 앨런에게 헤밍웨이를 거짓 인용할 권리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헤밍웨이는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릴 정도로 정신이 나간 인물이었지만 페도필리아는 아니었다. 헤밍웨이는 진실에 대해 쓰는 작가였다. 그리고 진실을 위해서 목숨을 걸 수 있었다.


그가 무엇을 위해 머리를 날렸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진실을 추구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품위를 잃지 말라. 어쩌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야말로 품위를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A가 처음으로 갔던 모국의 법정은 법을 다루는 성소가 아니라 도살장이었다. 사람들은 판사의 알지못할 말을 듣기 위해 법정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그들은 변호사도 없이 도살됐다. 죄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법 앞에서 올바르게 판단을 받으리라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어떤 변명도 발언도 금지된 그곳. A의 변호사는 가족을 보고도 울지 말라고 말할 뿐이었다.


하지만 A는 오랫동안의 우울증으로 감정에 메말랐고 어떤 우울증 환자는 폭탄을 터트리듯이 울기도 하지만 A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리지 않은 상태였다. 가족을 보고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고 자신에게 한달 반이라는 형량이 내려졌을 때도 별 느낌이 없었다. 집에 가는구나. 그 정도의 느낌.


A는 모국의 감옥에 있는 동안 답답한 느낌보다는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밖에서 약을 먹지 않은 A는 또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자신도 자신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 이것보다 무서운 일이 또 있을까. 제정신이 나간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정상으로 돌아온 A가 죄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뭔가 나아질지도 몰라. 하지만 좋은 글은 병이 없는 사람도 쓰기 어려운데 어떻게 정신나간 사람이 쓸 수 있겠어.


A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는 틀리는 법이 별로 없다. 특히나 자신에 관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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