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가적인 감정 상태에 있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일을 그만두고 진지하게 글을 쓰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진지하게 글을 쓸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글을 쓰는 일은 갈수록 힘들어지기만 하고 아무런 힌트가 없었다. 오롯이 글을 쓴다고 해서 진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글을 쓰는 일에 대한 온갖 방법론이 난무하지만 그 중에서 정말로 영향을 주는 이야기는 찾기 어려웠다.
일을 그만두고 소설을 쓴다면 언제까지 그렇게 할 것인가. 돈이 떨어질 때까지? 지칠 때까지? 소설을 계속해서 써나가는 목표는 뭘로 잡아야 할까. 어디라도 등단을 해야 할까. 정말로 등단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건 의외로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디에도 등단을 하지 못한다면? 예기 불안이 너무 심각해서 일을 시작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A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더니 어제도 옆집에 미사일이 날아왔다며 우크라이나에 살면 세상 걱정거리 중 대부분이 의미가 없어진다고 답했다. 이제 한국 뉴스 어디에도 우크라이나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와 전쟁 중이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그 전쟁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존재하지 않는 전쟁. 사람은 지금도 죽어간다. 누굴 위한 전쟁인가. 푸틴. 젤렌스키. 트럼프. 지독한 악당들이었다. 이자들은.
A는 우크라이나의 생활을 기반으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아침에는 반드시 커피를 마시고 오후에는 게워낸다. 저녁에는 약 기운에 취해 자야 할지 끝까지 버티다가 약을 먹어야 할지 고민한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동안 써보다가 지우고 다시 A의 삶에 집중해본다. A는 최소한의 돈으로 사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옆집 문을 두드려서 그 집에 사는 할머니와 함께 커피를 마셨다. 할머니는 어설픈 영어를 할 수 있었고 커피를 얻어 마시는 데에는 높은 수준의 어학 실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A는 할머니와 다양한 우크라이나어 예문을 연습해보았고 자신에게 언어적인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젊었을 때 A는 자신에게 문학적, 언어적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없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A는 우크라이나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어제 배운 단어를 오늘 잊어버리고 다시 외웠다. 문학성이 높은 작가들은 제2외국어나 영어를 배워서 번역자로 활동하기도 하는데. 역시 안되는 사람은 안되는 것인가. 될놈될. 안될안.
A는 어제 장강명의 에세이를 몇편 읽어보았는데 역시 재미있고 배울 점이 많았다. 장강명은 대학도 좋은 곳, 직장도 좋은 곳을 나와 글도 잘 쓰고 상도 잘 받고 전투력도 높고 드래곤볼로 치면 베지터 같은 인물이었다. 그럼 카카로트는 김초엽? 아니면 김동식? 김동식 작가를 떠올릴 때마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길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생각이 A는 들었다. 김동식은 주물 공장에서 낮에 하루종일 일하고 돌아와 유머사이트에 글을 올리며 자신을 단련했다. 그 글이 모 출판사 관계자 눈에 들어오게 될 줄을 김동식은 알았을까.
김동식 작가는 카카로트처럼 노동 계급으로 자라났지만 사실 알고 보면 왕자의 혈통을 가진 베지터를 압도할 정도로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문학 천재였다. 김동식 작가는 한국의 호시 신이치다. 김동식 작가에게도 배움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상당한 성취를 보였을 것이다. 호시 신이치는 일본에서 높은 IQ로 유명한 인물이다. 김동식 작가도 IQ가 높을까. 아니면 EQ? MBTI는 INTP? INFP?
A는 MBTI를 맹신하지 않았지만 김동식 작가가 E일 거라고 보기는 힘들다고 내게 말했다. 작가는 헤밍웨이처럼 밖으로 나돌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I인 경우가 대부분일 거라고 장담했다. 글쎄... 작가에게 E나 I같은 레테르가 중요할까. 독자를 웃겨보자고 MBTI 얘기를 해봤지만 생각보다 웃기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나도 MBTI는 믿지 않는다.
이제는 모국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그만 써야 한다. 그만 쓴다고 해서 뾰족한 답이 있을까. 계속 쓴다고 해서 성취가 있을까. 무슨 성취를 노리면서 이 이야기를 계속 쓰고 있는 걸까. A는 모국에 갔다. 큰 일을 당했다. 결국 원패턴이다. 사람들은 A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을 뿐이다. 재미가 없으면 의미라도 있어야 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