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사람은 얼마나 매력적인가.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모든 일이 마무리 되고도 1년이 지난 후였다. 나는 그동안 직장을 잃었고 쓰던 글을 어디에 적어놨는지 잊어버렸다. A의 말에 따르면 내가 A와 깊은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정작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었다. A가 지독한 거짓말쟁이처럼 느껴졌다.
미치지 않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종종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반복으로 이어졌다. 적어도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면 지루한 대화를 가장해야 한다. 뭔가 영감이 번뜩이고 비전이 보이는 것 같은 대화를 했다면 지금 자신의 정신이 올바른지 먼저 따져봐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대화는 과거의 반복이고 이미 알고 있는 사항을 차례대로 내놓는 약속대련에 불과하다.
말을 해서 뭔가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진 경우도 훨씬 더 많다. 하루 종일 아무하고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그만큼 고립돼 있다는 뜻인 것처럼.
잠이 잘 오질 않는다. 10시 넘어서 잠에 들면 비몽사몽간에 깬 상태로 하룻밤을 지새는 경우가 많다. 7시에는 약을 먹고 8시부터 자면 12시 정도에 깨고 꿈결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새벽까지 버틴다. 잠이 오는 약을 늘려봤지만 한번 흐트러진 수면 패턴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가진 병은 텔로미어가 짧다고 한다. 아니 텔로미어가 빨리 짧아지는 건가. 어느 쪽이든 자연이 정한 수명이 짧다는 뜻이다. 자살율도 높고, 기대 수명도 낮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치명적인 일이다. 더 심각한 일은 한명이 이 병일 때 자녀가 같은 병일 확률 몇십프로, 두명이 이 병일 때 같은 병일 확률이 더 높은 몇십프로라는 사실이다. 유전병은 아니란다. 유전병은 100%니까.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비슷한 사람끼리 만났을 경우에는 또 다른 비극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몇개 없는 것 같다.
점점 사는 게 쉽지가 않다. 원래 사는 건 쉽지 않다고 하지만 난이도가 한두단계 더 올라갔다. 내가 미쳤을까 안 미쳤을까 궁금하던 시절에는 모든 뿌옇게 보였는데 지금 내가 미쳤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된 후로는 모든 것이 암흑이다.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 않지만 더이상 해외를 자유롭게 다닐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글래스톤베리, 후지락, 섬머소닉, 클락켄플랍. 아직 더 봐야 할 페스티벌이 많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멈춰야 하다니. 그냥 라이브 스트리밍을 보는 걸로 만족해야 하다니. 보고 싶은 밴드, 들고 싶은 음악, 가고 싶은 나라. 갈 수야 있겠지만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또 한번의 수감 생활, 또 다른 기이한 일들은 정말 사양하고 싶다.
사양하고 싶지만 이 병은 재발율이 높다.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또 그 이상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기억을 잃고 헤매다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지 않을까. 죽음은 내 친구다. 그와 나는 여러번 마주쳤다. 지금에 와서는 거의 유일한 친구라고 해도 될 것이다.
글을 쓰는 행위 만이 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죽음이 나를 건져주지 못한다면 나는 어디로 떠내려가야 할까.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도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더 나은 직장을 구하고 그 직장에서 오래 지낼 수 있겠는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꿈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엔 거의 꿈을 꾸지 않는다. 현실이 하나의 꿈이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꿈, 그 이외의 것을 알지 못한다.
취생몽사라고도 하지만 술을 마시는 건 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A도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가 곧 나이고, 내가 곧 그이기 때문이다. A의 아버지는 매일처럼 술을 마시는 사람이었다. 술은 실수를 부른다. 인생 그 자체가 거대한 실수인데 또 하나의 실수를 불러올 필요가 있을까. 술을 마시는 것은 도망가는 일이다.
더이상 도망가지 않고 맞서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