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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성근 Jun 10. 2021

안토니 가우디

피플 스토리

한 천재의 죽음


1926년 6월 7일 오후 6시 30분,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 경찰이 기록한 53번 노트에는 전차에 치여 죽어가는 한 행려 병자에 관한 기록이 보고되고 있다. 노인은 사고 후 길거리에 수시간 방치돼 있었다. 시 당국이 운영하는 극빈자 병원으로 실려오기 전, 네 대의 택시가 이 지저분한 병자의 승차를 거부했다. 게다가 여러 병원들은 돈이 없어 보이는 노인의 입원을 거절했다. 결국 노인은 싸구려 여인숙 같은 병원으로 실려왔다. 그의 친구들이 수소문 끝에 노인을 찾아냈을 때, 그는 아직 살아있었지만 상처가 깊은 그의 왼쪽 얼굴에서는 이미 부패가 시작되고 있었고 심한 악취가 풍겼다. 6월 10일 새벽, 노인은 죽었다. 당시 스페인의 신문은 노인의 죽음을 이렇게 전한다. 


“바르셀로나의 한 천재가 우리 곁을 떠났다. 바르셀로나의 한 성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 돌마저도 그를 위해 울고 있다.” 


세계 최고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죽음이다. 그의 장례 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로 뒤덮였다. 바르셀로나 시민뿐 아니라 스페인 전체가 울었다. 건축학교를 졸업한 이십대 이후 75건의 건축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가우디는 그 어떤 건축가도 이루지 못한 독창성을 실현했다. 그가 지은 건축물은 자연처럼 완벽했고, 곤충이나 동물처럼 살아 숨쉬는 듯 했으며, 인간처럼 따뜻했다. 그가 마지막 생애를 바쳐 건축하고 있던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는 건축이 빚을 수 있는 예술적 아름다움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 준다. 


성가족 성당 Temple Expiatori de la Sagrada Família.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의 가우디


안토니 가우디는 1852년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대장장이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왕과 귀족, 권력가들의 땅인 카스티야가 아니라, 농민과 장인, 가난한 민중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카탈루냐 출신이라는 데 가우디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 카탈루냐는 “덧없는 돈과 권력 대신 인간의 영혼과 기술을 가진 땅”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방색’은 가우디가 설계한 거의 모든 건축물에 다 들어가 있다. 그는 최신 건축 공법보다는 손으로 작업하는 장인들의 손기술을 더 많이 활용한다. 


어렸을 때부터 관절염을 앓았던 탓에 병약했던 가우디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면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솥 만드는 과정을 구경하거나 들판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가우디는 자신의 공간 인지 능력이 아버지의 대장간에서 생겼다고 말했다. 평면의 구리판이 입체인 솥으로 변하는 과정은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고 한다. 또 누군가 그에게 어떤 건축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작업 하느냐고 물었을 때 가우디는 창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의 스승은 저 자연입니다.” 가우디의 천재성을 낳은 것은 가난한 대장장이의 대장간이었으며, 오랜 세월 버려진 황무지와 바위산이었다. 


가우디가 자신의 참고서라 부른 몬세라도 산. Montserrat


가우디 임팩트


그가 활동했던 19세기 말은 현대적인 건축 공법이 도입된 시기다. 파리의 에펠탑을 생각해 보면(1889년 완공), 수만 개의 철골을 이어붙인 직선의 조형물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이 시기에 건축가들은 철골, 유리, 시멘트 등의 현대적인 건축 재료를 활용해 건물을 지었다. 또한 직선과 공간 분할에 기초하여 모든 공간들이 빠짐없이 활용되도록 효율적인 공간 구성에 집착했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직사각형 모양의 건축물들이 19세기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가우디는 이러한 경향을 거부하고 주변 환경에 어울리는 건축, 자연의 기능을 최대한 살린 건축을 추구했다. 가우디가 그린 건축물의 설계도는 풍경을 그린 수채화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건축물은 실용성과 기능성, 견고함이 매우 탁월하다. 끝도 없이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곡선은 건물의 무게를 효율적으로 지탱하고 있으며, 어디서 들어오는지 알 길이 없는 태양빛이 건물 내부까지 신비롭게 스며 든다. 천장의 뼈 구조 트러스를 만들 때, 가우디는 끈에 매달린 구조물이 중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늘어지는 모양을 그대로 본떠 설계했다. 일반적인 건축에서 곡면 설계나 생태 공학 디자인, 자연 채광, 비대칭 구조와 같은 건축 방식은 20세기 말에 가서야 보급되고 있다. 


구엘 공원. Park Duell


사무실에서 건물을 설계하고 서류로 작업을 지시하던 건축가들과 달리 가우디는 직접 건설 현장을 찾아 건물을 설계하고 공사를 이어갔다. 특히 가우디는 현장에서 일하는 인부들, 기술자들, 장인들과 호흡을 맞추며 그들의 기술을 존중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훗날 한 기술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의 수공업 기술을 진심으로 이해한 사람은 가우디가 유일합니다. 아치 장식에서 마지막 돌을 놓고 가우디와 얼싸 않았던 그 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가우디는 카탈루냐 지방에 전해내려오는 전통 기술에 매료되어 장인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고 실제 공사 현장에서 많이 활용하기도 했다. 가우디, 하면 떠오르는 타일 공법 역시 그 지방의 장인들이 빚은 솜씨다. 



가우디의 영혼


젊은 시절부터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많은 건물을 지었던 가우디는 인생의 후반기에 성당 건축에 모든 열정을 쏟아붓는다. 예산 부족으로 건축이 중단되기도 했고 전쟁과 정치적 소용돌이로 나라가 시끄러워 건축에 집중할 수 없던 때도 있었다. 결국 가우디는 아예 공사중인 성당 건물에 숙소를 마련하고 그곳에서 수도사처럼 생활하면서 성당 건축에 전념했다. 그는 살아생전 성당이 완성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슬프게도 나는 성가족 성당의 완성을 보지 못할 것이다. 내 뒤를 이어 완성시킬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교회는 장엄한 건축물로 탄생하리라.” 


가우디가 건축한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카사 밀라 등의 작품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 성가족 성당은 가우디의 건축 정신을 이어받은 장인들에 의해, 그의 사후 100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공사가 이어지고 있다. 가우디의 영혼이 기초를 놓은 성가족 성당은 새로운 세대의 정신을 품고서 언젠가 완성될 날이 올 것이다. 


구엘 공원. Park Gu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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