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성근 Jun 11. 2021

이청준, 눈길

다시 읽는 한국 문학

이청준의 <눈길>은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시골에 사시는 늙은 어머니를 찾아간 아들 내외가 집수리 문제로 갈등하고, 기울어져가는 단칸방에서 옛날 이야기를 회상하며 하룻밤을 보내지요.소설은 먼저 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고향은 서울에서 천리 길 떨어진 어느 시골. 어렸을 때는 앞뒤에 너른 마당을 가진 다섯 칸 짜리 큰 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주벽이 심한 형이 또 가산을 탕진하고 죽은 뒤로 ‘나’는 떠돌이 고아처럼 어디 기댈 곳 없이 무척 힘겹게 살아 왔습니다. 나의 청춘은 무너진 집을 일으켜 세우는 데에 모두 소진되지요. 나는 늙은 어머니뿐만 아니라 형수와 어린 조카들까지 돌보았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빚이 없습니다. 그 만큼 해 드렸으면 됐지, 이제 와서 또 무얼 더 나에게 바란단 말입니까.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를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어머니를 ‘노인’이라 부릅니다. 노인은 그런 아들에게 단칸방 오두막의 지붕을 새로 얹어 달라 하기가 미안했는지 연신 풍년초만 피워 댑니다. 



노인은 노인대로 사연이 있습니다. 늙은이도 사람이니까 죽기 전에 깨끗한 집에서 한번 살아보자고 지붕 얹어달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라에서 새마을운동을 한답시고 지붕 개량 사업을 벌여 모두들 초가 지붕을 뜯어 내고 깨끗한 새 지붕을 얹었는데, 노인의 집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노인이 새 지붕을 바라는 참된 이유가 아닙니다. 노인은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힘들었지만 부끄러울 것 없이 살아온 인생이 저물고 있습니다.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친구들이 찾아 와 술 한 잔 기울일 방 없이 죽는 것이 쓸쓸하기 때문입니다. ‘노인의 소망은 바로 그 당신의 죽음에 대한 대비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쓰러져가는 오두막 방 한 칸에 노인과 아들 내외가 누워 밤을 지새웁니다. 


나의 아내가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살림이 망쪼난 뒤로 떠 돌아들어 살아왔던 노인의 삶, 궂은 밥 먹고 궂은 옷 입고 궂은 잠자리 속에 말년을 보내 온 노인의 삶입니다. 그러다 아내는 단칸방 한 가운데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는 옷장을 다른 데로 치우는 것이 어떠냐 말을 하면서 그 ‘옷궤’의 사연을 듣습니다. 


17,8년 전, 남편이 K시에서 고등학교 일 학년 다니던 때의 일입니다. 집이 망했다는 소식에 달려온 나는 세간살이를 다 비운 빈집을 봅니다.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마을 여기저기를 수소문 하던 끝에 먼 친척 누나에게서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때 노인이 찾아와 나를 맞습니다. 노인은 나를 데리고 살던 옛집으로 갑니다. 거기서 저녁을 지어 먹고 노인과 함께 하룻밤을 보냅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노인은 거기서 마지막으로 내게 저녁밥 한 끼를 지어 먹이고 당신과 하룻밤을 재워 보내고 싶어,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그렇게 혼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노인도 마을을 떠돌며 아들을 기다렸고, 빈집에서는 옷궤 하나가 동그마니 남아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밤, 웬 눈이 그리도 많이 내렸던지 동트기 전에 나선 사오리 길이 온통 눈천지가 되었습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면소 차부까지 노인은 아들을 배웅합니다. 아들은 노인과 함께 걸어갔던 그 길은 기억하지만, 그 길을 되돌아 혼자 걸어왔던 노인의 발걸음은 알지 못합니다. 노인은 그때의 일을 아내에게 들려줍니다.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이청준의 <눈길>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짧은 단편소설이지만 여러 화자들의 사연과 목소리가 얽혀 들어가 마치 한 편의 드라마처럼 한 집안의 내력을 속속들이 보여 줍니다. 작가는 각 등장인물들의 주관적인 시선, 내면의 목소리, 주고받는 대화, 과거의 일화를 정교하게 직조해 냅니다. 그리하여 독자의 머리속에서 이들의 삶 전체를 이해하게 만들어주지요. 독자들은 어머니를 ‘노인’이라 부르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고, 단칸방 오두막 집을 수리하려는 어머니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참지 못하는 아내의 눈물과 함께 독자들 역시 마음 아파 합니다. 


소설의 절정은 ‘17,8년 전’ 새벽의 눈길, 그날의 정경에 가서 머무릅니다. 독자들 역시 그 길을 함께 걷습니다. 아이를 버스에 태워 보내고 돌아가는 길, ‘아직도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었던지,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습니다. 매섭게 부는 찬바람 사이로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그 아이가 뛰어나올 것만’ 같습니다. 어머니는 아이의 발자국만 따라 걷습니다. 눈길 위에 눈물을 뿌리며 어머니는 빕니다.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쌓인 눈 위에 찍힌 아들의 발자국은 아들이 남긴 흔적이면서 어머니가 흘린 눈물 자국입니다. 이청준의 <눈길>은 어머니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걸었던 힘겨운 삶에 관한 이야기이고, 아들이 몰랐던 어머니의 발자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눈 녹듯 사라진 세월의 아픔에 관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안토니 가우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