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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성근 Jun 18. 2021

흔적

커플-로맨틱 필로소피

[이 글은 대화문으로 이루어진 초단편소설입니다. <커플-로맨스 필로소피>라는 제목으로, 철학적 개념과 함께 연인들의 이야기를 재구성합니다. 이 글에 나온 사연, 고백, 이야기들은 실제와 허구가 뒤섞여 있으며 일부 에피소드는 인터뷰에 기초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선물 같은 건 진작에 내다 버렸죠. 아깝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어요. 향수, 목걸이, 귀걸이, 반지, 이런 건 헐값에 팔았어요. 그런 건 그냥 버리기에 좀 아깝고 해서. 사진이랑 동영상 지우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디지털 흔적을 관리한답시고 사귀면서도 나름 관리하긴 했는데, 어디서 불쑥 튀어나오곤 해요. 마치 살아 있는 생물 같아요.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거. 어느 새 전 그 사람과의 추억을 퇴치해야 할 바이러스라고 생각하게 된 거였죠. 


한번은 빨래감을 세탁기에 넣다가 원피스에 묻은 이상한 얼룩을 발견했어요. 누런 때가 왼쪽 허리 부분에 있었어요. 아끼는 원피스였는데, 사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텐데도 제 눈엔 그 자국이 그렇게 크게 보일 수가 없었어요. 아마 그의 손에서 묻은 얼룩 같아요. 제 허리를 잡고 다니면서 그의 손에 묻은 땀 때문에 찌든때가 됐나 봐요. 황순원의 <소나기>에도 나오잖아요. 소년의 땀 묻은 등에 업혔을 때 생긴 스웨터의 얼룩. 소녀가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이, 그 스웨터를 입혀서 묻어 달라는 거였죠. 중학교 때 그 부분을 읽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요.


어쨌든 구글에서 얼룩 제거 꿀팁을 샅샅이 뒤져 온갖 짓을 다해 봤어요. 과산화수소, 옥수수전분, 주방 세재, 백식초, 안 해 본 게 없을 거예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토요일 반나절을 그가 남긴 얼룩과 씨름했어요. 그냥 버리면 되는 거였는데. 더 산뜻한 옷을 사면 그만인 것을, 말이죠. 마지막으로 해 보고 안 되면 버린다, 이런 생각으로 독하게 맘 먹고 강력 얼룩 제거제를 슈퍼에서 사다가 옷을 비벼 빨고 있었죠.


그때 폰이 울렸어요. 그 사람 이름을 지웠지만 전화번호는 알죠. 씩씩거리며 숨을 쉬면서 화면에 뜬 그의 번호를 한참 동안 들여다 봤어요. 독한 세재 성분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눈물이 나대요. 손에 든 원피스에서 거품물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지고, 손에 낀 고무장갑으로 코를 만지다가 심한 제채기가 나기도 했어요. 독하게 맘 먹고 몸을 홱 돌려 욕실로 가는데 갑자기, 발신이 끊어지면 어쩌나, 그런 생각이 막 들었어요. 저는 미친 듯이 뒤돌아 달려갔고 잽싸게 폰을 들었어요. 


-수연아. 


그 목소리에 완전히 녹아 내렸죠. 오빠, 오빠, 나 오빠 손 자국 얼룩 지우고 있었어. 근데 이게 안 지워져. 오빠, 오빠 때문이야, 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펑펑 울었어요. -수연아, 내가 미안해.- 하는 말을 듣고는 거의 기절할 것처럼 대성통곡 하면서 울었어요. 


이게 다 그 얼룩 때문이에요. 아무리 빨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의 흔적 때문에. 그래서 우린 다시 만나게 된 거죠. 


한참 뒤에 다른 옷들을 확인해 봤어요. 어김없이 왼쪽 허리 부분에 옅은 얼룩이 있었어요. 우린 걸어갈 때 그렇게 걷거든요. 내가 왼쪽에, 오빠가 오른쪽에. 그렇게. 



흔적은 누군가의 부재 뒤에 남는 존재의 자국이다. 사물 혹은 물질들이 불러 일으키는 관념은 매우 다양하다. 흔적에 대한 관념은 물질 자체의 속성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기억, 욕망, 불안, 단절의 의지, 욕설과 저주, 파괴적 망상, 아련한 향수와 같은, 온갖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정신 작용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흔적은 제거의 대상이 되거나 기다림의 표지로 남는다. 아니면 무의식의 심연으로 가라 앉아 특정 반응을 자극하는 촉매가 된다…… 얼룩을 지우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강력한 얼룩 제거제는 인체에 해로운 화학 성분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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