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상실의 마음 다스리기
오늘 글은 조금 조숙한 사춘기 아이들에게는 무리 없이 다가가겠지만, 감정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것입이다. 이별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짧은 드라마 한 편을 본다고 생각하고 읽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별은 낯선 경험이지만 우리에게 늘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이 친구와의 절교 선언이든, 반려동물의 죽음이든, 혹은 사랑의 이별이든. 오늘은 이별 이야기로 들어가 봅니다.
그 날은 비가 왔고 차가운 바람도 부는 11월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에 나는 이별을 했었습니다. 이별의 이유는 수천 가지가 넘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나는 가난하고 불안정한 대학원생이었습니다.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에 나는 당황했지요.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수천 가지 이유들 중에 대여섯 가지의 이유를 골라 말했던 것 같습니다.
“너는 너무 이기적이야. 너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지, 늘 항상 내가 기다려야 해. 네가 하는 일에는 빈틈도 없고 다시 생각해 볼 만한 여지도 없어. 나는 늘 뒷전이지. 내가 널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니? 이미 수도 없이 말했지만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
그녀는 그 이유들을 대면서 울었습니다. 나도 울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저 눈물을 보고도 이 사태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다니요. 그녀가 이별의 말을 마쳤을 때 나는 이미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추억은 고통의 칼날이 되어 나를 찌를 것이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창밖의 빗방울들이 세로로 떨어지며 날을 세웠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말한 이별의 이유는 나 자신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어설픔과 이기적인 마인드, 내 모습 자체와 나의 단점들, 이미 안정된 직장을 얻어 회사 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나는 대단히 미숙한 남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나의 능력 없음과 불안정한 미래는 또 다른 이유였습니다. 그 이유들은 내가 해결하기 어려운 나 자신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해 온 시간 어느 틈에선가 우리는 갈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내가 그런 모습이라면 나는 함께 할 이유가 없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녀는 약간 놀라는 눈빛이었습니다. 얼핏 떨리는 눈빛을 그녀의 눈에서 본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카페의 출입구로 걸어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우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은 안 것은 빗방울이 눈꺼풀을 세차게 때릴 때였습니다. 카페로 다시 들어갈까 잠시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자 그런 행동은 모양이 나지 않겠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웃긴가요. 방금 이별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이, 그리고 화가 난 듯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뜬 사람이, 장엄하고도 냉정하게 이별의 순간을 받아들였던 사람이, 두고 온 우산을 챙기러 다시 들어가는 꼴은. 순간 그 우산을 쓰고 함께 웃으며 걸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우산을 가지러 돌아간다면, 어쩌면 모든 일을 다시 돌려 놓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불평과 투정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서로 충돌했지요. 빗물에 눈이 따끔거리고 시야는 흐려졌지만, 발은 여전히 망설임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나는 차가운 빗길을 걸었습니다. 다시는 되돌아가지 못하는 추억에 잠겨, 빗방울과 눈물이 뒤섞인 얼굴로 홍대 앞 상점 거리를 돌고 돌았습니다. 밤늦은 시간, 북가좌동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내 몸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 열흘 열병을 앓았습니다. 아, 나의 자취방이여! 내 아픈 신음과 통곡 소리를 말없이 품고 있던 내 젊은 날이여! 나는 이별이 그렇게 아픈 줄 몰랐습니다. 살이 쏙 빠지고 외모는 수척해졌으며 머리털도 숭숭 빠졌습니다. 이별은 생각보다 큰 고통을 내게 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 안락함을 쫓습니다. 무엇이 더 어려울 것 같은가요? 고통 피하기와 안락함을 얻기. 동전의 양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을 피하기가 훨씬 어렵습니다. 그 증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종교들에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고통을 피하고 덜어주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세계 4대 종교로 알려진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이 종교들의 교리를 보면 고통과 슬픔이 없는 안락한 세계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고통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영광만 가득하겠네” 흑인 영가로 알려진 <눈물 없는 곳 No More Pain>의 첫 구절입니다. 고통스런 노예의 삶 속에서 고통을 피하려는 노예들의 울부짖음이 얼마나 구슬피 들리는가요.
세계 4대 종교 중에서도 인간의 고통 문제에 가장 민감한 종교는 불교입니다. 불교는 고통을 피하는 것을 넘어 아예 고통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불교의 경전들은 인간의 삶에서 고통이 왜 발생하는지(고통의 원인), 고통이 어떤 모습인지(고통의 양태), 고통을 없애는 방법(고통의 소멸)은 무엇인지 자세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교리가 석가모니의 ‘고집멸도(사성제)’ 사상입니다.
사성제에 따르면 고통은 집착에서 일어나는데 집착을 없애고 마음을 비우면 고통도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집착을 버리지 못할까요? 그것은 세상의 존재와 현상이 불변한다고 보는, 일종의 착각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권력과 명예가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 젊음의 시간이 지속되리라는 생각, 이 모두는 착각입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 늙고 병들며 죽습니다. 세상 만물이 영겁의 세월 속에서 무한히 변화합니다. 불교의 이러한 통찰은 깊고 어두운 우물을 내려다볼 때처럼 아찔합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원리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변화하는 것들을 붙들고 집착에 빠지면 고통이 따릅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을 아는 데 있습니다.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며, 집착은, 그 집착의 대상이 불변하리라 보는 착각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집착을 버리고 고통을 피할 수 있을까요? 석가모니는 그에 대해 여덟 가지의 가르침(팔정도)를 제시했습니다: 바르게 보고(정견), 바르게 생각하고(정사유), 바른 마음을 알고(정념), 바르게 노력하면(정정진) 집착이 사라지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부처님의 팔정도를 길게 설명하면 글이 너무 지루해질까 염려되어 짧게 요약했습니다. 한 가지씩 곱씹어 생각하면 이 여덟 가지 가르침으로도 인생 만사가 풀릴 것입니다.)
한 열흘 크게 앓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사랑은 변했고 그녀는 떠나고 없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이별과 상실의 아픔도 줄어들었습니다. 몇 달 후에는 비가 와도 무색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우산은 새로 샀고요. 당연한 일이지만 비가 와도 그냥 비를 맞고 걷는 일도 없었습니다. 내 삶은 다시 평온과 안락을 되찾았고 아무 일도 없는 일상이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일로 그 카페 앞을 지난 적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우산이 생각났습니다. 그 날, 나는 왜 발길을 돌리지 않았는지, 왜 우산을 핑계로 그녀에게 다가가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는지… 화가 난 사람처럼 카페 문을 나서던 내 모습이 카페 문 앞에서 오버랩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우산 하나에 미련과 집착이 찾아 들었습니다. 아픔은 여전히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었지요. 그저 고통을 피하기 위해 기억을 지우려 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기억 속의 우산 하나에 과거와 미래가 뒤섞이며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지금 알고 있는 석가모니의 말씀 한 구절을 그 때도 알았더라면, 아픈 마음이 그리 오래 가진 않았을 텐데요.
“과거를 쫓지 말라. 미래를 갈망하지 말라.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현재의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보라.”
-『잡아함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