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훈, 남한산성

두 개의 길

by 송성근

홍타이지의 청

1636년 병자년 겨울에 오랑캐 여진족 십만 명이 말을 몰고 쳐들어 왔습니다. 12월 28일, 한강은 수십 센티미터 두께의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을 만큼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 언 강을 건너 인조는 피난을 갔습니다. 우리 역사는 이 전란을 이름하여 병자호란(1636년)이라 합니다.


지금의 중국 지린성 일대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추장 누르하치의 통치 아래 후금을 건국(1616년)합니다. 여진족은 만주족이라고도 불리며 기마술과 활쏘기를 잘했습니다. 여진족은 중국 내륙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미친 유목민의 후예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으로 직접 내려 온 황제는 누르하치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입니다.


홍타이지의 어머니는 만주족 명문가 출신의 여자였습니다. 누르하치가 여러 부족들의 힘을 규합하는 과정에서 맞아들인 아내였지요. 광해군은 그 출신 가문을 보고, 홍타이지가 2대 칸에 오를 것을 미리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후금에 보낸 사신들에게 홍타이지 세력과 접촉하고 그 세력을 회유하라는 밀명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의 외교팀은 모두 교체되거나 귀양을 가 버리면서 홍타이지와의 인연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홍타이지는 후금의 2대 칸 태종 황제가 됩니다. 다른 형제들을 유폐시키거나 죽였고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몽골족 정벌에 성공하여 몽골족의 칸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홍타이지는 인내심이 강하고 통솔력이 뛰어났던 황제로 평가됩니다. 그가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명 침략에 앞서 배후 세력을 평정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병자호란은 이렇게 복잡한 외교 관계를 배경에 깔고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홍타이지가 직접 말을 몰아 조선으로 내려 온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청의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은 비록 변방 국가였지만 역사와 전통이 깊은 국가였기에 그 세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 때문입니다. 군사력에 있어서도 과거 고려 때 금나라를 굴복시킬 만큼 강한 나라였지요. 또한 조선은 뛰어난 문명 수준을 가진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문자와 법률, 예법이 발달한 조선은 청의 입장에서 볼 때 ‘인적 자원’이 풍부한 나라였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은 군대를 철수하면서 조선인 50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청 본토로 끌고 갑니다. 이 중에는 각종 분야의 기술자와 여자를 포함해 문장을 잘 쓰는 학자들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에서 일종의 행정 전문가로 일하며 건국 초기 청나라의 행정 일을 도왔습니다.


인조의 조선

그러면 병자호란을 직접 겪은 인조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인조의 할아버지는 선조입니다. 선조의 아들이었던 광해군과는 삼촌-조카 사이였지요. 광해군은 비록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과 통찰을 보여주었지만 내치(內治)에는 소홀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궁궐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백성들을 함부로 공사에 동원했고 많은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심지어 지방 관리들에게 뇌물을 바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선조의 아들이었던 영창대군을 죽이는 잔인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정의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며 돌보는 일에도 소홀했고 궁녀들과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신하들 사이에는 불만이 쌓였고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반정(反正)으로 이어집니다. 반정은 나쁜 것을 고쳐 바른 상태로 되돌린다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나쁜 임금을 폐위시키고 나라를 태평하게 만든다는 의미이지요. 인조반정은 인조가 직접 주도하여 광해군을 몰아낸 사건으로 1623년(광해군 15년) 3월 12일에 일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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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은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13년이 지난 1636년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소설 <남한산성>에 나오는 두 신하, 최명길과 김상헌은 대청 외교를 두고 갈림길에 서서 다툽니다. 최명길은 아주 똑똑한 신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 년 만에 세 번의 과거 시험에서 모두 급제를 한 천재적인 사람이었죠.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는 대청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인조는 그렇게 비극적인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김상헌 역시 훌륭한 학자이자 선비였습니다. 두 신하는 모두 조선의 임금과 백성의 안위를 걱정하는 충신이었습니다. 병자호란 이후, 청 태종 홍타이지는 최명길과 김상헌을 보고 자신에게 그들과 같은 신하들이 없음을 한탄했다고 할 정도로 두 사람은 지혜와 절개가 굳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길은 비록 달랐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하나였습니다. 한마음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길이었기에 소설 속에 펼쳐지는 두 사람의 갈등이 더욱 안타까운 것입니다.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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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본래 주인이 없습니다. 풀과 나무는 길과 들을 가리지 않고 자라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걸음이 땅을 다져야 비로소 들은 길이 되지요. 원래 길이 없던 곳에 길이 생기면 사람들은 길이 아닌 곳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방향이 없는 들의 트임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들로 나간 사람은 길에서 벗어난 자, 즉 배도자(背道者)라 부릅니다.


병자년 겨울(1636년 12월)에 호적이 언 강을 넘어 임금이 도망친 성채 앞에 이르렀을 때, 조선의 신하들은 자신들에게 길이 없음을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성채의 돌벽을 더듬으며 옛길의 추억을 떠올릴 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지나온 과거의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떻게 뒤를 향해 걸으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들은 길이 없는 곳, 길이 아닌 곳으로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홍타이지가 쳐들어왔을 때도 조선의 임금과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습니다. 그곳은 몽골의 군대가 들이닥쳤을 때 고려의 임금과 신하가 도망간 길이었습니다. 남한산성은 그들에게 낯선 길이었을 겁니다. 늘 도망가던 길이 아니라서 낯설었을 겁니다.



상헌

김상헌은 ‘오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지금껏 조선이 오던 길은 명을 섬기고 오랑캐를 멀리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그 길 이외의 길을 상상하지 못합니다. 명을 여태껏 섬기던 길이 조선의 질서를 만들고, 예절을 세우며 법과 형벌을, 선과 악을, 삶과 죽음을 구분해 주었습니다. 상헌에게, 명을 섬기지 않는 길은 길이 아니므로 도달할 목적이 없으며 머물 곳도 없습니다. 하물며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길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길을 벗어나면 부끄럽습니다. 길로 가지 않고 길 아닌 곳으로 가면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상헌에게는 지나온 길 한가운데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명길

그러나 명길이 보기에 지나온 길로 나아가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 길의 이름이 ‘도(道)’라 해도, 그 길 끝에 죽음이 있다면, 절벽과 함정이 있다면, 그것은 길이 아닙니다. 명길은 이미 지나왔던 길로 가지 않고 오직 ‘나아갈 길’만 생각합니다. 지나온 길은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들로 나가고 풀을 밟아 새 길을 뚫어야 합니다. 길이란 본래 길이 아니었습니다. 나아가면 길이 될 뿐입니다. 명길은 애타게 ‘길’을 구합니다.



홍타이지

홍타이지는 말을 타는 자입니다. 말의 발은 사람의 발과 다릅니다. 사람은 길로 다니지만 말은 들판을 달립니다. 말에게는 수평의 대지가 모두 길이므로 달릴 수만 있다면 못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홍타이지에게는 ‘참된 도(道)’가 없습니다. 말을 타고 달려 온 홍타이지는 오직 방향만 생각할 뿐입니다. 그에게는 가야 할 길이 없기 때문에 가는 곳이 전부 길입니다. 말발굽은 그 걸음을 방해하는 것을 짓밟습니다.



땅과 길

조선의 임금은 길 끝의 죽음을 보고서야 가던 길을 멈춥니다. 이제 성안을 맴돌던 제자리걸음을 멈추고 들판으로 나아갑니다. 지나온 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던 관습이 결국 제자리 돌기였음이 밝혀지지요. 조선의 임금은 새로운 길을 무릎으로 기어서 출발합니다. 청 황제의 발 아래 엎드려, 머리를 땅에 찧으며, 들판도 길임을 비로소 배웁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서야 조선의 임금은 모든 단단한 땅이 길임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이백 여 년 동안 그들의 조상들이 다져온 길 이외의 길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임진년(1592년)에 큰 전쟁을 치르고 나서, 조선은 왜군이 버리고 간 조총을 역설계 하여 총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실전에 써먹을 수 있는 대단한 무기는 아니었죠. 만약 조선에 제대로 된 조총 부대가 있었다면, 오랑캐의 말발굽에 맞설 수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변화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소리 없이 변하고 있었지만 조선은 그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병자년 막바지에 이 땅 위로 울려 퍼진 커다란 말발굽 소리는 변화의 파도가 내는 소리였습니다. 그해 겨울,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임금은 자존의 길과 치욕의 길, 오래된 길과 새로운 길, 두 가지 길을 놓고 치열하게 고뇌합니다. 결국 임금은 남한산성의 작은 문을 빠져나가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그 땅에 머리를 대고서 새로운 길을 보았을까요? 이 세상 모든 땅이 길일 수 있음을 그는 알게 되었을까요?

병자호란은 조선이 새로운 길로, 들판으로 나아가게 만든 최초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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