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켤레의 구두 한 사람의 세계

진·선·미와 숭고함으로 읽는 삶의 품위

by 송성근

사람의 신발은 그 사람이 지나온 발자취를 보여 줍니다. 어제 산 것처럼 새하얀 운동화를 신은 학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학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구두 뒷굽이 절반쯤 닳은 구두를 신은 남자를 보면 그이의 고단한 발걸음과 삶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지요. 윤기가 사라진 에나멜 구두를 신고 뛰어 가는 여자, 김치국물이 튀어 있고 솔기가 빠진 운동화를 신고서 졸고 있는 학생, 우리는 모두 신발을 신고 생활하기에 신발은 그 사람의 삶의 운동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윤흥길의 단편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우리가 매일 아침 신고 집을 나서는 신발이 어떻게 인간의 자존심과 연결되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성남에 사는 ‘나’가 전과자 세입자 권씨와 그의 가족을 맞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입니다. 갖은 고생 끝에 성남에 집을 마련한 ‘나’(오 선생 내외)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자 문간방에 세를 놓기로 합니다. 그곳으로 들어온 권씨 일가는 살림살이라곤 이불 몇 가지와 가재도구, 주방 식기 몇 개가 전부인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거기에다 권씨는 과거 ‘광주대단지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는 신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권씨가 없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열 켤레의 구두를 소중히 여기고 닦는 것입니다. 실직과 막벌이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권씨는 볕 좋은 날 습관처럼 구두들을 닦습니다.


흙과 먼지를 죄 떨어낸 다음 그는 손가락에 감긴 헝겊에 약을 묻혀 퉤퉤 침을 뱉어 가며 칠했다. 비잉 둘러가며 구두 전체에 약을 한 벌 올리고 나서 가볍게 솔질을 가하여 웬만큼 윤이 나자 이번엔 우단 조각으로 싹싹 문질러 결정적으로 광을 내었다.

구두를 닦는 권씨의 손길은 그의 자존심과 존엄을 상징합니다. 한 때 출판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그는 “이래 봬도 대학 나온 사람”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공사장에 나가 막일을 할 때조차 구두를 신고서 합니다. 아내의 출산 비용을 마련키 위해 ‘나’에게 돈을 빌리러 온 날에도 반짝반짝 광이 나는 구두를 신고 오지요. 구두는 그가 포기할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 자존심인 셈입니다.


그날 밤 권씨는 강도 행세를 하며 ‘나’에게 들이닥칩니다. ‘나’는 얼굴에 반쯤 복면을 하고서 흉기로 위협하는 그가 권씨인 줄 알면서도 같은 집에서 생활해야 하는 처지를 짐작하여 그를 모른 척하지요. 강도이면서 권씨이기도 한 그는 결국 아무것도 훔치지 못하고 ‘나’의 집을 빠져나갑니다. 다음날 나는 권씨 집으로 가 집안에 고이 놓인 아홉 켤레의 구두를 보며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게 됩니다.


이 소설은 1970년대 산업화 시기 사회 밑바닥 인물들의 현실과, 그 속에서 피어난 미묘한 인간관계를 깊이 있게 드러냅니다. 소설에서는 권씨가 어째서 그렇게 많은 구두를 갖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권씨가 밑바닥 인생을 살기 전에 대학도 나오고 출판사에도 다니면서 박봉이었겠지만 괜찮은 생활을 했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두를 소중히 여기고 닦는 그의 모습은 자기 인생에 대한 애착을 드러냅니다. 구두는 단지 가죽과 고무를 덧댄 신발에 불과하지만 사회적 위치와 직업을 짐작케 하는 소재이지요.


이 소설을 보면서 우리는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완성해 낸 미적 경험의 세 가지 범주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칸트는 어떤 대상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 즉 미적 경험을 진(the true), 선(the good), 미(the beautiful)로 설명합니다.


‘진’의 관점은 진리의 여부에 관심을 갖는 관점을 말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구두는 가죽에 고무 밑창을 덧댄 도구입니다. 이 관점에서 구두를 보면 구두는 그것의 기능과 실용성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구두의 가격은 얼마이고 어떤 브랜드의 것이냐 등 구두가 가진 객관적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지요.


'선'의 관점은 대상을 선과 악의 관점에서,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구두는 사회적 상징성을 갖는 도구입니다. 구두를 신는다는 것은 사무직 노동자의 신발을 신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의 학력과 지식 노동자로서의 삶을 엿보게 해 줍니다. 선의 관점에서 볼 때 권씨는 자신의 신발을 단순한 기능적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열 켤레의 신발에서 자기 인생의 궤적을 느끼며 바람직한 삶의 모델을 발견합니다. 그는 신발을 지켜야 합니다. 열 켤레의 신발이 인생의 무게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미'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두는 단지 여러 재료를 조합한 사물일 뿐인데도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쳐집니다. 어떤 구두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반면 어떤 구두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구두를 대하는 권씨의 태도가 다른 이에게 이상하게 보인다면 그것은 권씨가 구두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이 느끼지 못한 데서 오는 이질감 때문입니다.


칸트는 이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감정적 느낌을 세 가지로 구분한 후 진정한 분별력은 필요에 따라 대상을 이렇게로도 볼 수 있고 저렇게로도 볼 수 있는 관점을 갖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진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권씨에게는 열 켤레의 구두가 필요 없습니다. 기능적으로 동일한 신발을 그렇게 많이 가지는 것은 낭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권씨는 미의 관점으로 구두를 바라보았고 단순한 신발이지만 그 대상에게서 미적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의 태도에는 선의 관점도 찾을 수 있습니다. 구두를 닦으면서, 비록 자신의 처지가 지금은 비참해도, 대학 나온 사람이라는 것, 사무직 일자리를 가졌다는 점을 은근히 과시하는 태도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칸트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진선미의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분별력을 보여준다 해도, 우리는 그 분별력을 넘어 스스로를 압도하는 미적 실체를 경험합니다. 막대한 바다를 볼 때의 느낌을 떠올릴 수 있나요? 하늘의 깊이와 높이는 어떤가요? 갑자기 마주한 대상이 내뿜는 막대한 느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칸트는 이를 가리켜 ‘숭고함’이라 부릅니다. 인간이 자신의 실체를 넘어서는 대상을 만날 때 우리의 미적 판단은 중지됩니다. 그저 막대하고 압도적인 느낌을 가질 뿐입니다. 숭고함의 느낌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감정과 비슷합니다. 자신을 초월하고 통제할 수 없는 막막한 느낌의 감정입니다. 이런 감정 앞에서는 우리 스스로를 초라하게 느끼게 됩니다. 인간이 신을 만날 때의 감정이 바로 숭고함입니다.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그 감정의 깊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를 접할 때 단지 이해의 깊이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칸트의 특별함은 그 감정을 진선미로 구분한 데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신발 한 켤레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눈을 지니게 되었군요. 우리는 신발 한 켤레에서 그 기능과 우월함, 우아함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 분별력을 다른 사물에 대입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권씨의 아홉 켤레 구두처럼, 닳아가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품위를 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계의 깊이에 여러분은 얼마나 감동을 받나요? 여러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가요?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구두끈을 묶습니다. 닳아가면서도 끝내 놓지 않는, 우리만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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