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는 시간

현대인의 욕망에 대하여

by 송성근

라면이 생각나는 시간은 항상 밤입니다. 일찍 먹은 저녁이 소화가 된 탓인지 밤이 되면 시장기가 돌지요. 냄비에 물이 끓는 동안 바스락 거리는 라면 봉지를 만져 봅니다. 농심, 삼양, 팔도 라면들은 언제 봐도 정겹습니다. 밀가루 음식, 탄수화물의 공격, 공업용 기름 등 온갖 비방에 불량 식품 취급을 받았음에도 살아남은 라면입니다. 라면은 항상 먹고 싶어도 못 먹게 하는 음식이고, 그것만 계속 먹으면 탈이 나는 음식이고, 건강에 해악을 끼치는 음식, 금지와 금기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라면은 ‘현대인의 욕망’을 닮았습니다. 오늘은 라면을 끓이는 시간, 현대인의 욕망 문제로 들어가 봅니다.


욕망은 금지가 시작될 때 탄생합니다.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아이는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른들은 아이에게 사탕 주기를 멈춥니다. 그 때 아이는 굶주리지 않았는데도 사탕을 원합니다. 이 순간이 욕망이 탄생하는 때입니다. 욕망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욕망 자체를 욕망한다는 특징을 갖습니다. 사탕의 금지가 사탕을 갈구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욕망에 앞서 금지가 있고 그 금지가 욕망을 키웁니다.


현대 사회가 도래하기 전까지 욕망은 대개 부정적으로 비쳐져 왔습니다. 식욕이나 성욕과 같이 인간이 가진 욕망은 그것에 깊이 빠질수록 생명이 줄어든다고 보았지요. 라면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여서 라면을 많이 먹으면 건강에 해롭다고들 합니다. 욕망에 대한 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정확하게는 1960년대에 들어 욕망은 비로소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활동한 여러 철학자들은 한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이 정말 스스로가 원해서 갖게 된 욕망인지를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타인의 욕망을 강요당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비판했지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소망하는 것은 정말 내가 원해서 갖게 된 소망일까?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 내가 추구하는 패션 스타일과 같은 소망 리스트들은 어떻게 해서 내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을까요? 그것들은 애초에 부모님(양육자)의 영향 아래에서 생겨났을 겁니다. 유아들은 아직 자신의 욕구를 명확히 구별하지 못할 때, 부모님이 좋아하는 음식, 부모님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접하면서 욕구를 해결합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부모님이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욕망과는 다른, 나만의 욕망을 갖는다는 것을 가리켜 철학에서는 ‘욕망하는 주체’가 된다고 말합니다. 욕망하는 주체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나와 타인을 구별하는 진정한 주체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하는 주체가 되었다 해도 내가 추구하는 욕망은 여전히 바깥 세계에서 나에게 강제된다는 점입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면서 생존을 이어가는 산업 사회는 대량 소비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시대는 소비가 미덕이요, 소비를 실천해야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상품이 만들어져서 소비자에게 소비되는 과정을 일컬어 ‘상품의 실현’이라 하는데, 상품의 실현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광고입니다. 모든 광고의 한 가지 원칙은 필요와 결여를 만들어 내는 데 있습니다. 당신이 이미 갖고 있는 상품이라 해도 광고를 접하는 순간 낡은 것이 되고 맙니다. 굳이 불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게 되는 것도 광고의 전략 때문입니다. 잘 생긴 연예인이 일단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이번 기회에 새로 하나 장만하는 게 어때? 할인 가격으로 사려면 딱 지금밖에 없어. 당장 사야 해.” 이렇게 해서 소비자는 물건을 구매하고 상품을 실현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품의 실현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가 깨닫게 되는 필요와 결여입니다. 욕망이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과정 말입니다. 이전에는 불필요하게 보였던 상품이, 충분한 듯 보였던 물건이, 갑자기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낡은 것으로 변화합니다. 우리의 시선에서 작동하는 욕망이 꿈틀거리기 때문입니다. 산업 사회는 일찍이 이러한 광고의 중요성을 깨닫고 광고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TV, 신문, 잡지, 라디오, 유튜브, 이들 매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하다면 광고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드라마와 드라마 사이,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 틈 속에,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사이에 광고가 끼여 있습니다. 우리는 드라마를 소비하면서 동시에 광고를 접하게 됩니다. 대중 매체들은 광고를 실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드라마의 성공 여부는 드라마에 대한 시청률 여부가 아니라 광고의 접촉률에 의해 판가름 납니다. 상품 광고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다면 우리는 그 만큼 욕망을 빚진 셈이 됩니다.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으로 나를 채우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다른 한편, 완전히 주체적인 욕망으로 자신을 가득 채운 사람 역시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 인간의 정신 구조를 파헤친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존재입니다. 정신분석학은 겉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이성적 사유 아래, 저 깊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여전히 억압된 욕망이 자리하고 있음을 간파했습니다. 정식분석학자들은 타인과 사회 공동체가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억누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억압이 너무 커지면 강박증, 망상증, 편집증, 우울증 등 갖가지 정신증으로 나타난다고 보았지요. 인간의 내면을 탐색한 결과 우리는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며 타인의 욕망과 부딪히고 상처 입으면서 성장한다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통찰이었습니다.


라면이 보글보글 끓고 있습니다. 면을 넣고 4분 정도를 기다리면 맛있는 라면이 만들어집니다. 스프를 먼저 넣는가, 면을 넣은 후 스프를 넣는가에 대한 논란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그 순서야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이와 비슷하게 인간은 수동적으로 타인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존재인가, 아니면 자신의 내면에서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 사이에 대결을 벌이며 자기 욕망을 생성해 내는 존재인가, 그 과정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길들이는 것이며, 나와 타인이 공존하는 방법입니다.


욕망을 길들이는 일은 사소한 순간에서 시작됩니다. 밤 11시, 주방 불을 켜고 라면을 꺼내는 대신 물 한 컵을 데워 마셔 봅니다. 의외로 허기가 가라앉을 때도 있습니다. 새 휴대폰을 사고 싶을 때는 구매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일주일간 ‘대기 목록’에 넣어 봅니다. 그 사이 욕망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욕망과 거리를 두는 연습은 억압이 아니라 관찰에 가깝습니다. 관찰하는 동안 욕망의 진짜 얼굴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외부에서 심어진 것인지, 나 스스로 빚어낸 것인지 구분할 힘이 생기지요. 라면도 그렇습니다. 어떤 날은 라면을 끓여 나누어 먹는 기쁨이 더 큰 욕망이 되고, 또 어떤 날은 끓이지 않고 참는 선택이 나를 자유롭게 합니다. 욕망은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길들이고 함께 살아야 할 동반자입니다. 중요한 건 욕망이 나를 끌고 다니게 하지 않고, 내가 욕망의 고삐를 잡는 것입니다.


나와 타인의 공존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 서로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부모님 중에서 사랑받기 원하는 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님 역시 나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서로의 중력으로 이끌리며 서로를 당기고 밀어내는 것이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애정과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나 한입만 주라” 하고 말하면 라면 한 젓갈 듬뿍 떠서 주는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내 안에서 길들이는 방법이 아닐까요?


욕망을 길들이는 일은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나누고, 나눔 뒤에 남는 감정까지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욕망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됩니다. 라면을 다 먹고 나면, 그릇 바닥에 국물이 남아 있습니다. 욕망도 그렇습니다. 다 비워낸 줄 알았는데, 그 향과 온기가 여전히 남아 있지요. 우리는 그 잔향을 아쉬워 하며 그릇을 씻습니다. 그게 인간의 삶이고, 욕망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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