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갈매기의 근본적인 자기 이해
철학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원리와 가설, 교리와 내용을 이해하는 ‘분석의 길’(the analysis of thinking)입니다. 이 길을 가려면 오랜 공부와 독서가 필요합니다. 이 길에서는 지식의 족보를 익혀 더 나은 지식을 만들어가지요. 여러 생각을 분석하다 보면 지식을 많이 얻게 되고 그 지식을 활용해 더 크고 유용한 지식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석의 길에서는 내가 가야 할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저렇게 살았다, 하는 교훈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교훈이 내 삶의 목적을 보여주지는 않거든요.
철학을 하는 또 다른 길은 ‘생각을 생각하는 길’(the thinking about thinking)입니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이런 삶을 사는 걸까? 나는 왜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싫어할까? 지금 내가 가진 생각이 올바른 생각일까?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면 여러분은 이미 철학자입니다. 철학을 하는 두 번째 길을 가고 있죠. ‘생각을 생각하는 길’에서는 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의심’하게 됩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신의 생각에서 어떤 허점을 발견하고 새로운 자기 이해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 번째 길을 조금 어려운 말로 ‘근본적인 자기 이해’라 합니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근본적인 자기 이해입니다. 겉으로 보면 조나단은 멋진 비행과 활강을 위해 자신과 싸우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는 자신이 갈매기라는 생각과 싸웁니다. 갈매기는 정말 갈매기이기 때문에 고속비행이나 저공비행을 할 수 없을까? 갈매기가 어둠 속에서 날아서는 안 되는 이유는 뭘까? 먹이를 얻기 위해 비행하는 것과 비행을 위해 비행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조나단은 자신이 갈매기이기 때문에 먹이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전통과 싸우죠. 갈매기로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생각을 조나단은 거부합니다.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조나단은 말합니다. “비쩍 말라도 상관없어요, 엄마. 저는 공중에서 무얼 할 수 있고, 무얼 할 수 없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다예요. 그냥 알고 싶어요.”
대부분의 사회는 근본적인 자기 이해를 매우 위험하게 여깁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야.’ 누군가가 저렇게 말한다면 그 말은 이렇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은 필요없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난 내 길을 가겠어.’ 그는 오직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는 이기주의자로 낙인찍히거나 올바른 가치와 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 되고 말죠. 조나단 역시 갈매기 사회의 비난을 받습니다.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 중앙에 서라. 너는 언젠가는 무책임한 행위가 아무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것이다. 삶은 알지 못하며 알 수도 없는 것이지. 다만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할 수 있는 데까지 먹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1957년에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근본적인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철학의 길을 가리켜 ‘반항’이라 했습니다.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회가 권장하는 삶의 패턴을 의심할 때, 이는 반항이 된다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삶을 살다가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밥을 먹고, 전철을 타고 회사에 가서 일하고, 밥 먹고, 일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집에 와서 밥 먹고, TV를 보다가 잠을 자고, 다시 아침 6시에 일어나….
카뮈는 이렇게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현대인의 삶을 ‘시지프스의 형벌’에 비유합니다. 신들을 속이고 이간질한 시지프스를 잡아다 놓고, 제우스는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이 뭘까 고민합니다. 그러다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리죠. “그래, 엄청나게 무거운 돌을 산꼭대기까지 옮기게 하는 거야.” 거기까지라면, ‘뭐, 벌 거 아니네!’ 하겠죠. 그런데 이 돌이 산 아래로 굴러떨어집니다. 시지프스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시지프스는 죽지도 않고 돌덩이 옮기기를 반복합니다. 그것도 영원히. 카뮈는 말합니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
카뮈는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는 삶’이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살기 위해 먹고 먹기 위해 사는 무의미한 되돌이표가 반복될 때 인간은 고통을 느낍니다. 아무리 큰 성공을 이루어도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면 고통이 시작되지요. 그래서 카뮈는 주장합니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다. 정말 이 길이 맞는지 시험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무의미한 삶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자기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을 의심해야 하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을 의심할 때 이는 반항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소리칠 겁니다. “왜 다른 새처럼 사는 게 그리 어려운게냐?” 선생님과 친구들은 “중앙에 서라!”며 협박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으르릉 댈 겁니다. “잘난 체 하지마. 네가 뭘 그리 대단하다고…. 야, 너도 똑같애. 날개 한 짝에, 노란 주둥이, 물칼퀴 달린 발, 봐. 똑같잖아. 지가 무슨 봉황새라도 되는 줄 아나 봐. 얘, 웃긴다, 그치?”
그럴 때마다 조나단 리빙스턴의 가르침을 되새겨야 합니다.
“수평비행부터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