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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성근 May 15. 2020

작은 섬을 천국으로 바꾼 소녀

초록 지붕 집의 앤

작은 소녀의 행복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의 여성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지은 소설입니다. 1908년에 출판되었으며 원래 제목은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입니다. 두드러진 빨간색 머리카락, 깡마른 몸, 얼굴에는 주근깨가 가득한 앤 셜리는, 예쁘지는 않지만 생기 넘치고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입니다. 


앤의 모습에는 작가 자신의 모습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루시 몽고메리도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소설 속의 주요 배경은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라는 섬입니다. 우리나라 제주도 면적의 1/4 정도 크기입니다. 이 섬 역시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지요. 유명한 ‘초록 지붕 집’은 그 섬에 실제로 있습니다. 몽고메리의 사촌이 사는 집이었고 지금은 관광 명소가 되었습니다. 


프린스에드워드 섬은 오늘날 전 세계 빨강머리 앤의 팬이 반드시 방문하는 성지입니다. 특히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면서 이 만화 영화를 보고 자란 일본 여성들이 『빨강머리 앤』에 열광합니다. 홋카이도 아시베츠 시에는 빨강머리 앤을 소재로 한 테마파크까지 있을 정도라지요. 일본 여성들이 빨강머리 앤에 열광하는 현상이 어찌나 특이했던지, 다큐멘터리로 다룬 적도 있습니다. 


프린스에드워드섬 에이번리 마을 전경


사람들은 왜 앤을 그토록 좋아할까요? 소설을 읽어보면 우리는 이 불쌍한 고아 소녀의 사연을 알 수 있습니다. 부모의 죽음, 고아원 생활, 양부모가 나타나 데려가기를 기다리는 애처로운 소망, 결국 행복한 가족을 꿈꾸며 입양되지만 무뚝뚝하고 쌀쌀맞은 마릴라 아주머니는 말합니다. “뭔가 잘못됐어.” 그들은 다정한 부모도 아니었고, 머슴 같은 사내아이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재잘거리고 툭 하면 자기 상상 속에 갇히는 앤 셜리는, 우여곡절 끝에 초록 지붕 집의 가족이 됩니다. 하지만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농촌 마을에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의 예의범절을 엄격하게 지키며 살지요. 유머 감각도 별로 없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처럼 아무 변화도 없고 지루합니다. 


우리의 앤 셜리에게는 그런 마을의 평화가 꿈만 같았습니다. 앤은 언제 다시 버림받을지 몰라 불안에 떠는 고아 소녀였으니까요. 학교에 다니고, 집안일을 거들어 주며, 가끔 이웃들과 만나 담소를 나누는 평화로운 일상에 앤은 행복해 합니다. 게다가 초록 지붕 집이 있는 마을은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꽃과 초목이 만발한 들판, 수정처럼 맑은 시내가 있는 숲길, 파란 하늘과 초록지붕 집. 그곳은 앤이 상상 속에서 꿈꾸던 곳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느끼는 풍요로운 감정의 비밀은 바로 앤이 느끼는 행복에 있습니다. 앤에게는 마을과 집의 모든 것이 천국처럼 아름답기만 합니다. 이웃집에 사는 같은 또래의 친구 다이애나는 앤과 단짝이 됩니다. 둘이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말썽을 피웁니다. 처음에는 불 같이 화를 내며 앤을 다그치던 마릴라 아주머니는 앤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점차 마음을 열기 시작하지요. 그것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던 사람들은 앤의 투명한 영혼과 순수한 열정을 사랑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앤의 미래를 응원합니다. 


앤은 불행이 가득한 고아 소녀입니다.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까지 앤은 버림받은 존재였습니다. 에이번리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이 작고 빼빼마른 수다쟁이 여자 아이를 낯설어 합니다. 학교 친구들은 앤을 못 살게 굴고, 마을 사람들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편견 때문에 앤을 차갑게 바라보지요. 만약 앤이 그렇게 밝고 명랑한 아이가 아니었다면, 앤은 위선적이고 고집 센 사람들이 가득 찬 시골 마을에서 외톨이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의 앤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갑니다. 슬픔과 불행은 앤을 떠나지 않지만, ‘빨강머리 앤’은 아름다운 여자로 자라나게 됩니다. 




버림받은 소녀

『빨강머리 앤』은 앤 시리즈의 첫 번째 소설입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Lucy Maud Montgomery)는 앤의 성장과 결혼, 자녀들의 이야기까지 이어가는 8권의 소설을 계속 출판했습니다.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중에 앤은 길버트 블라이스와 결혼하게 됩니다. 『빨강머리 앤』은 앤 셜리가 11살에 초록 지붕 집으로 처음 온 후, 16살을 지나 초등학교 교사가 될 때까지의 에피소드가 다루어집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 1874-1942.


풍부한 이야기가 담긴 이 소설은 두 가지 주요 메시지를 품고 있습니다. <앤 시리즈>의 두드러진 메시지는 버림받은 아이-고아의 삶입니다. 몽고메리도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친아버지는 살아 있었지만 어머니가 죽자 이제 갓 두 살이 된 어린 딸을 버리고 재혼을 합니다. 몽고메리가 자라던 19세기에는 고아들이 많았습니다. 앤처럼 부모님이 모두 죽어서 고아가 된 경우도 있었지만 아이를 버리기도 했습니다. 


고아는 대부분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문학가로 알려진 영국인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고아의 삶을 다룬 소설을 많이 썼습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라는 대작은 한 고아 소년의 성장기를 그린 소설로, 신문에 연재될 당시, 사람들은 신문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찰스 디킨스의 또 다른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도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의 생존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영국에 찰스 디킨스가 있다면 미국에는 마크 트웨인이 있습니다. 미국 현대 문학의 출발로 일컬어지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에서 주인공 허클베리는 친아버지에게서 온갖 학대와 매질을 당하는 가여운 소년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가 잘 아는 환상 동화 『피터 팬』 역시 고아들의 이야기입니다. 네버랜드는 버림받은 아이들이 사는 나라이지요. 


19세기의 문학가들이 고아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많이 다룬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아는 사회에서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아이들은 적절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금방 죽을 수도 있습니다. 가여운 고아 소녀 앤 셜리가 마음씨 착한 커스버트 씨네 집으로 들어간 건 정말 큰 행운이었죠. 사람들이 앤의 행복을 보며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품는 이유는 인간의 가장 비참한 고통을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는 매튜와 마릴라의 따뜻한 마음 때문입니다. 


화사한 햇빛이 드는 앤의 방. 프린스에드워드섬. 캐나다


앤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여성으로서의 삶’입니다. 결국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평범한 삶을 선택하는 앤의 모습은 전근대적인 여성의 생활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앤은 당시의 여성상에 충실하면서도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대부분의 여성이 집에서 살림만 하고 있을 당시에 앤은 길버트와 함께 부부 교사로 살아가지요.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남성과 당당하게 경쟁하는 앤은 능동적이고 현대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앤>의 작가 몽고메리는 아마도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1848년 출판)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제인 에어의 여주인공 역시 고아로 자라며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갖습니다. 앤의 어린 시절도 제인 에어와 비슷합니다. 


『빨강머리 앤』에는 특별한 갈등이나 위기가 없습니다. 악한 인물이나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소설을 읽다보면 계속 긴장감을 느끼게 되지요. 그 이유는 앤이 겪는 사회적 위기 때문입니다. 앤이 또 버림받으면 어쩌나, 커스버트 씨 남매는 정말 앤을 도와줄까?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면 어쩌나, 남자 아이들이 앤을 궁지에 몰아넣지는 않을까?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앤이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마릴라 아줌마 곁에 머무르겠다니, 앤은 그냥 평범한 농촌 아낙이 되지 않을까? 이런 긴장감이 독자들로 하여금 앤을 응원하게 만들어 줍니다. 다행히 우리의 앤은 모든 일을 잘 해냅니다. 


빨강머리 앤


매튜 아저씨는 심장마비로 죽기 전날 밤, 앤을 “사랑스러운 내 딸!”이라고 부르지요. 그는 은행이 파산하여 전 재산을 잃게 되지만 아름답게 자라난 앤을 보며 행복 속에 평온한 죽음을 맞습니다. 그것은 마릴라 아주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앤을 훌륭한 여자로 키웁니다. 앤은 품위 있으면서도 활기찬 열정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자로 자랍니다. <앤 시리즈>를 계속 읽어보면 앤은 마릴라 아주머니처럼 검소하고 실용적인 생활 습관을 가진 당찬 여성이 됩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할 줄 알고 때로는 정의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크게 낼 줄도 압니다. 그러면서도 늘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앤은 ‘커스버트 씨네 외동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67세로 생을 마감한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그 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캐나다와 영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앤 셜리의 마을로 알려진 프린스에드워드 섬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빨강머리 소녀의 기쁨과 행복을 보기 위해 매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 섬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앤 셜리의 동상. 프린스에드워드섬.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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