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3시간씩 카페테리아에서 “Work study student”(학교에서 일하는 학생)로 일했다.
처음 카페테리아에서 일을 시작할 때는 2층에서 모니카와 함께 쿠키 굽는 일을 했다. 하지만 모니카는 정식 직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을 학생인 나에게 시키고 하루종일 멍하니 서 있었다. 또 입만 열면 카페테리아의 다른 직원들 흉을 봤다. 아까운 시간을 더 이상 모니카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매니저 벤을 찾아갔다.
“벤, 당신은 알고 있나요? 모니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손가락과 입으로 지시만 해요. 그녀는 절대 손이나 발로 일하지 않아요.”
벤은 다 알고 있었다. 카페테리아 직원들도 모두 아는 일이라고 했다. 모니카는 이미 많은 동료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었던 것이다. 모니카만 아니었다면 2층에서 계속 일했을 것이다. 직접 고객을 만나는 일이 나는 재미있었다.
입구에서 캐셔 일을 보던 다나는 아주 친절해서 내가 카페테리아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쿠키코너 옆에서 커피와 음료를 담당하던 티나도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였다. 심지어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녀는 먼저 다가왔다.
“루미, 당신도 한국 김치 만들 수 있어요? 당신 집에도 김치 냉장고 있나요?”
“물론이죠. 김치를 만들 줄 아는 한국 사람은 많아요. 여기에는 없지만, 한국 집에는 김치 냉장고도 있어요.”
티나는 어디서 들었는지 김치냉장고까지 알고 있었다. 정말 김치냉장고가 따로 있는지 몹시 궁금하다고 했다.
카페테리아 2층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2층 직원들 모두와 친해졌다. 내가 티나, 다나와 친하게 지내며 재미있게 일을 하자 모니카는 은근히 질투하며 그 사람들과 얘기하지 말라고 했다. 모니카는 그냥 자기 옆에 꼭 붙어 서 있으라고만 했는데 나는 답답했다.
그때 모르는 할머니가 여러 종류의 빵과 샐러드를 쟁반 가득 들고 와 조용히 진열해 놓고 1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봤다. 모니카에게 물었다.
“모니카, 저분은 누구예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해요?”
“루미, 저 사람은 몰라도 돼. 아무하고도 말 안 하고 혼자 일만 하는 사람이야.”
멍하니 서 있는 게 견딜 수 없어 다시 벤을 찾아갔다.
“루미, 힘들면 1층 샌드위치 만드는 곳에서 일을 해보는 건 어때요?”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서는 직접 고객을 상대하지 않고 샌드위치나 여러 종류의 빵과 샐러드를 만들어 2층 냉장 진열대에 진열만 했다. 이곳에서 할머니 헬렌을 만났다. 헬렌은 자상하고 부지런했다. 헬렌은 자기소개를 하면서 ‘헬레나’라는 자기 이름이 너무 옛날 이름이어서 촌스럽다고 했다. 언젠가 ‘데비’도 자기 이름 ‘데보라’가 촌스럽다고 불평을 한 적이 있었다.
‘아, 미국 사람들도 자기 이름을 촌스러워하는구나. 내가 듣기엔 다 똑같은 영어 이름인데’
헬렌은 정확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루미는 나이가 많은데 왜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꿈이 뭐야?”
“지금은 영어로 내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요. 한국으로 돌아가서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고요.”
헬렌은 화가가 되고 싶어 지금도 시간이 나면 집에서 혼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루미, 너 정도면 영어 잘하는 거야. 나는 한국말 하나도 못해.”
우리는 일할 때 조용히 라디오를 켜놓았다. 주로 오래된 영화나 음악 이야기가 나오는 채널이었다. 라디오에서 휘트니 휴스턴이 흐느끼고 있다.
영화 ‘보디가드’의 OST인 ‘I Will Always Love You’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헬렌과 나는 주방에서 루꼴라 샌드위치를 만들다 말고 둘이 얼굴을 마주 보며 황홀하게 서로를 쳐다봤다.
“Oh, How beautiful her voice is!” (오, 그녀의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케빈 코스트너의 그 멋진 경호는 또 어떻고요.”
우리는 감탄하며 영화음악에 빠져들었다. 한참 동안 영화 ‘보디가드’를 이야기하며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빵을 만들고 커다란 쟁반에 담아 2층으로 올라갔다. 진열하고 다 팔린 빵은 없는지 확인했다. 우리 둘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때마다 모니카는 말없이 우리를 곁눈질로 쳐다보곤 했다.
샌드위치와 샐러드를 만들면서 헬렌은 내가 모르는 채소 이름을 많이 알려주었다.
헬렌이 만든 루꼴라 샌드위치를 처음 먹어봤을 때 루꼴라의 약간 매운맛과 향이 딱 내 스타일이었다. 루꼴라 샌드위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샌드위치가 되었다.
한국도 요즈음 다문화사회가 되면서 루꼴라 요리가 많아졌다. 샌드위치, 피자, 샐러드 등. 맛있는 루꼴라 요리를 먹을 때면 헬렌이 떠오른다.
우리의 좋은 사이를 눈치챘는지 어느 날 매니저 벤이 물었다.
“루미, 우리 ‘Sodexo’(소덱소, 회사 이름)에서 헬렌이랑 같이 일하는 건 어때요?”
한 마디로 나를 특별채용 하겠다는 말이다. 헬렌과 같이 일한다면 그것도 좋은 기회다. 하지만 나는 우리나라로 돌아가야 할 학생이었다.
공부가 끝나고, 카페테리아 일도 끝나는 날, 헬렌에게 감사편지를 썼다. 헬렌은 나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루미, 넌 꼭 멋진 글을 쓰는 작가가 될 거야. 내가 기도할게.”
그녀는 다정하기도 했다.
내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헬렌을 만난 건 모니카 때문이었다. 최악의 파트너가 최고의 파트너를 선물해 준 것이다. 정말 사람의 인연은 아리송하다.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나와 맞지 않다고 바로 배척할 필요는 없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조금 더 기다려볼 일이다. 혹시 아는가? 전혀 아닌 사람이 완전히 내 스타일의 사람과 만나는 계기를 만들어 줄지?
보고 싶은 헬렌은 지금 음악을 듣고 있을까?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