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비가 나를 향해 걸어온다.
아담한 키에 수수한 옷을 입고 조금 낡아 보이는 가죽가방을 들었다. 점점 가까워지더니 어느새 우리는 반가운 포옹을 했다. 우리 동네 Public Library (공립 도서관) 앞이다. 데비는 1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에서 만나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고 있는 자원봉사 선생님이다.
나는 자주 도서관에 들러 어린이 책과 그림책을 읽고, 책 몇 권을 빌려 돌아오곤 했다. City Hall(시청) 옆에 있는 도서관은 나에게 아주 편안한 공간이었다. 작은 방에서는 늘 소모임이 열렸다. 도서관 프로그램을 보며 내가 참여할 만한 게 있을까 기웃거려 봤지만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독서 모임과 보드게임, 퀼트를 하거나 종이접기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오전 내내 도서관에서 혼자 여유를 즐기다 책을 빌리려고 사서에게 갔다. 그런데 언젠가 도서관에서 영어를 가르쳐주는 자원봉사자를 소개해 준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사서에게 물었다.
“영어를 배우고 싶은데 혹시 저에게 영어 가르쳐 주실 분 계실까요?”
사서는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몇 년 전까지는 자원봉사자들을 연결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어요. 원하신다면 YMCA나 1주일에 한 번씩 하는 다운타운의 NCC 무료 영어클래스에 다녀보세요. 주소를 알려줄게요.”
그때 내 뒤에서 책을 빌리려고 기다리며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자그마한 키의 은발 아줌마가 말을 걸어왔다.
“영어공부를 하고 싶으세요? 괜찮다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요. 1주일에 한 번씩 이 도서관에서 만날까요?”
그녀가 바로 데비다. 데비는 나를 만나기 전, 이 도서관에서 영어 가르치는 봉사를 했었다고 한다.
우리는 매주 토요일 오전 도서관에서 만나 한 시간씩 공부했다. 나이를 물을 수는 없었으나 나보다는 더 많아 보였다.
그녀는 대학에서 Pre-Med Advisor(의대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로 일하고 있었고, 그녀의 남편은 외과의사로 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필라델피아의 명문사립대학인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났다고 한다. 그들에겐 아들도 두 명 있었다.
데비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싶었으나 박사학위가 없어 교수를 할 수 없게 되었다며 몹시 후회된다고 했다.
데비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결혼했고, 바로 두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남편의 일자리를 따라 이곳으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공부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데비는 매시간마다 철저하게 수업 준비를 해와서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느 날은 우리 동네 지도를 가지고 와 길거리 이름을 알려주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파네라 브레드(‘빵 바구니’라는 빵집 이름)에서 깜짝 세일하는 날도 알려주었다.
내가 어려워하는 발음을 위해서는 비슷한 발음의 낱말을 여러 개 찾아와 연습시켰다. beat(이기다)와 bit(조금 약간), beach(해변)와 bitch(암캐 창녀), eat(먹다)와 it(그것)를 발음할 때 입을 옆으로 더 길게 찢거나, 길게 발음하거나, 짧게 하거나 등 조금씩 다르니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인 데비는 수업 준비를 완벽하게 해 왔지만, 학생인 나는 공부하기 귀찮은 날도 많았다. 그럴 때면 아프다는 핑계를 대거나 급한 일이 생겼다며 수업에 빠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 모습을 눈치챈 데비는 가끔 나를 데리고 드라이브도 하고 트레킹도 했다. 데비가 사우콘밸리 트레일(산책로 이름)로 자전거 하이킹을 가자고 제안했지만 내가 자전거를 못 타서 갈 수 없었다.
사우콘밸리에는 유명한 프라이빗 컨트리클럽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지은희 선수가 이곳에서 2009년 US여자오픈 골프대회를 우승했다고 한다. 경치가 아름다운 동네였다.
내가 김치 담그는 날, 한국 음식에 관심을 보이는 데비를 우리 집에 초대했다. 김치 담그는 모습을 보여주며 데비에게도 직접 배추를 버무려 보라고 했다. 그녀가 버무린 김치는 집에 가져가도록 했다. 그랬더니 자기 배추에는 고춧가루 양념을 거의 바르지 못하고 쩔쩔매며 살짝만 발랐다. 내가 버무린 배추를 보고는 너무 빨갛다고 놀라워했다.
다행히 아들들이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프린스턴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작은 아들이 한국 김치를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매운 김치를 맛본 데비가 놀라며 물었다.
“한국에서는 어린아이도 김치를 먹을 수 있어?”
“아니에요. 저희 애들은 두 살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김치를 물에 씻고 작게 잘라서 주었어요. 그때 미리 우유 한 잔을 준비해 두고, 아이가 김치를 먹었을 때 옆에 있던 어른들은 모두 손뼉을 쳐주며 응원했지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데비는 아이보리 색 털모자와 벙어리장갑을 끼고 왔다. 그 모습이 소녀 같아 한참을 쳐다보았다.
“엄마가 직접 뜨개질로 짠 거야. 돌아가실 때까지 쓰다가 나에게 물려주셨어. 아주 오래된 거야.”
데비는 화장도 안 하고 향수도 쓰지 않았다. 화학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든 제품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직 얼굴에만 썬 블록을 바르고 선글라스만 낀다. 자동차도 스틱이다. 스틱이 오토보다 기름이 훨씬 적게 들어 경제적이라며 남편과 두 아들도 모두 스틱 자동차를 탄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날, 데비는 나를 자기 집에 초대했다. 한국부채를 선물로 가지고 갔다. 그녀가 나를 가르칠 때 예시문장 속에 늘 등장하던 남편 ‘프랭크’도 처음 만났다.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에는 두 아들의 어릴 적 사진을 넣은 오너먼트(장식품)와 카드가 걸려 있었다. 벽난로 위에는 헝겊으로 만든 양말이 걸려 있었고, 식탁에는 예쁜 접시와 와인글라스가 촛불에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점점 정이 들었고 1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데비가 버지니아 주로 이사 가면서 우리는 헤어졌다.
얼마 뒤, 데비에게 랭케스터 아미쉬 마을로 1박 2일 여행을 떠나자는 메일이 왔다. 비록 아미쉬 집에서 숙박체험을 하기로 한 우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다.
데비 앞에서는 말도 안 되는 영어로 신나게 수다를 떨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데비는 그런 나를 조용히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내가 말하려다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하고 “음~~ 음~~~”하고 헤매고 있으면 조용히 기다려 주었고, 내가 단어를 찾으면 이해를 하고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떤 때는 데비가 바로 내 마음을 꿰뚫어 보듯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하기도 했다.
내가 필라델피아의 한인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 데비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교회로 찾아왔다. 데비는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고 자라 대학까지 다녔다.
“루미, 나도 성당 신자였어. 비록 지금은 자주 안 나가지만.”
우리는 같이 미사를 보고, 한국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오래오래 나누었다.
우리나라로 돌아온 뒤에는 서로 메일을 주고받으며 소식을 전하고 있다. 데비는 얼마 전 프랭크가 은퇴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도 두 딸이 결혼했다는 소식을 사진과 함께 전해 주었다.
인생의 깊이와 멋을 아는 데비,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미소가 지어진다.
데비와 나는 전생에 친구였을까? 우리는 정답게 늙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