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지가 왼쪽에 있다는데 지나쳐 버렸다. 다시 U-turn 해서 비상라이트를 켜고 천천히 살핀다.
저 멀리 길거리에서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고 있는 데비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 ‘Amish farm and house’ 앞이다. 데비는 버지니아주에서, 나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운전하고 왔다.
아주 오래전 한국에서 <witness>(목격자)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이곳 아미쉬 마을이었다. 언젠가 데비에게 문명을 거부하며 18세기를 살아가는 아미쉬들의 삶이 궁금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데비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며칠 전 데비에게 이메일이 왔다.
“루미, 이번 주말에 네가 가고 싶어 했던 랭케스터에 가자. 내가 다 예약하고 준비할게. 너는 조심해서 오기만 해.”
깊은 포옹이 끝나고 우리는 아미쉬가 살았던 집으로 들어갔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아미쉬의 생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검소하게 사는 아미쉬들은 남자는 하얀 셔츠에 검정 멜빵바지, 모자를 쓰고 턱수염을 길렀다. 예전에는 지퍼나 단추도 장식품이라며 달지 않았단다. 여자들은 몇 가지 색이 더 있지만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옅은 보라, 분홍, 청색계열의 옷을 입는다. 무릎 밑으로 내려오는 원피스에 앞치마를 덧입고 머리에는 하얀 보닛을 쓴다. 심지어 결혼식 때도 똑같은 옷을 입는다고 한다.
전기를 쓰지 않아 티브이나 라디오, 전화기도 없다. 물론 자동차도 타지 않는다. 18세기 모습 그대로 단순하고 실용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아미쉬들은 1700년대에 독일과 스위스에서 침례교에 반대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왔다. 친환경을 실천하며 옛날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미국에서는 오하이오주에 가장 많이 살고 두 번째가 펜실베이니아주라고 한다.
교육은 전 학년이 한 교실에서 서로 돕고 배우며 8학년까지만 공부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학교인데 그 정도 교육이면 살아가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16세가 되면 1년 정도 바깥세상으로 나가 체험해 보고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않거나는 자신의 선택이다. 돌아오지 않는 젊은이들도 가끔 생긴다고 한다. 또 16세가 되면 운전면허 대신 버기면허(마차)를 딴다.
아미쉬들이 자동차 대신 타고 다니는 buggy(마차)를 타보기로 했다. 데비가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 놓은 마차 타는 곳으로 갔다.아미쉬 할아버지가 마차를 가지고 와 우리를 자기 농장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사과밭과 복숭아밭을 지나고 옥수수밭을 지나 농장에 도착했다. 이 농장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1800년대에 지어 쓰던 것을 보수해서 지금도 잘 쓰고 있다고 한다. 마침 젖소 우유 짤 시간이 되어 그의 아들과 손자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8살쯤 되어 보이는 손자가 먼저 소독된 수건으로 소의 젖을 닦고, 그의 아버지가 유축기를 꽂아 배터리를 돌렸다.
마당에서는 그의 며느리와 손녀들이 집에서 만든 쿠키, 프레즐, 루트비어를 팔고 있었다. 데비는 프레즐을, 나는 루트비어를 사 먹었다. 이름이 특이해서 먹어 봤는데 맥주는 아니고 식물의 뿌리로 만든 특이한 맛의 탄산음료다. 3대가 함께 사는 모습, 어린이들도 자기 몫의 일을 하며 서로 돕는 것을 보니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마음이 따뜻해졌다. 오고 가는 길에 아미쉬들을 만나면 호기심 많은 나는 재빨리 셀폰 카메라를 눌렀으나 바로 내려놓았다.
“루미, 아미쉬들은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 않아. 조심해.”
데비의 자동차도 아미쉬마을에서는 버기처럼 천천히 달린다.
“지금 많이 덥지 않으면 에어컨을 꺼도 될까?”
데비가 에어컨을 끄고, 자동차의 창문을 연다. 그녀의 차에는 내비게이션도 없다. 운전석과 오른쪽 의자 사이에는 펜실베이니아주 전체 지도가, 왼쪽 창문 주머니에는 랭케스터 지도가 들어있다. 이번 여행을 위해 인터넷으로 찾은 정보와 예약한 숙소 등이 적힌 메모지 몇 장도 보인다.
데비가 아미쉬 여인의 옷을 입고 보닛을 쓰고 그대로 아미쉬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예약해 놓은 숙소를 찾아갔다. 허허벌판에 딱 한 채만 있는 집이다. 주위는 온통 끝없이 펼쳐진 콩밭이다. 역시 기대한 대로다. 흥분된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앗, 그런데 좀 이상하다. 전등이 켜져 있고 냉장고가 보인다. 보통 집과 똑같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비에게 물어보았다.
“데비, 여기 아미쉬 집 맞아요?”
데비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고 그녀는 아미쉬가 아니라고 했다. 아미쉬 마을에 사는 일반인이란다.
“이 마을에는 일반인과 아미쉬들이 섞여 살고 있어요. 아미쉬와 일반인을 구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밖에 빨랫줄이 보이고 빨래가 널려 있으면 아미쉬고, 그렇지 않으면 일반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미쉬 마을에 살고 있는 일반인, 그녀의 잘못은 없었다.
“데비, 생각해 봐요. 아미쉬들은 전기를 쓰지 않는데 어떻게 컴퓨터로 예약을 받겠어요?”
“루미, 네 말이 맞아. 내 실수였어. 미안해.”
뒷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마시멜로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닥불 가에 앉았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총총히 빛났고 바람은 시원했다. 처음엔 불이 너무 뜨거워 서로 멀리 앉았다가 밤이 깊어 갈수록 점점 더 불 가까이 다가갔다. 모닥불에 구워 먹는 마시멜로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루미, 너를 처음 봤을 때 너에게는 내가 필요해 보였어.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었어.”
도서관에서 사서에게 영어 가르쳐줄 자원봉사자 좀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데비는 내게 다가왔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한순간에 넘나드는 나의 엉터리 영어는 끝이 없었다.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몰랐던 10대 때는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어요.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삶이 안정되고 나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네요.”
우리는 최근에 읽은 책부터 시작해 자식, 건강, 은퇴 후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지에 대해서 등 폭넓은 대화를 새벽까지 나누었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21세기 AI 시대를 살고 있는 바깥세상 사람들은 18세기를 살아가는 아미쉬를 신뢰한다. 말들과 함께 밭을 갈아 재배한 아미쉬의 채소와 달걀을 찾는다. 아미쉬가 직접 손으로 깎고 다듬어 만든 가구를 더 비싼 가격으로 구입한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답답할 때면 눈을 감고 과거로 여행을 떠난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아미쉬 마을, 말이 끄는 버기가 느리게 달린다. 넓은 들판 집 마당에 빨래가 펄럭이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검은색 멜빵바지와 모자를 쓴 아미쉬가 말과 함께 밭을 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편안하고 느긋해진다.
*아미쉬 마을로 여행을 계획한다면 일요일은 피해야 한다. 모든 아미쉬들은 종교적인 신념으로 일요일은 영업하지 않는다. 아미쉬 마을에 사는 일반인들의 가게만 영업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