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린 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니 이메일 하나가 와있다.
‘Due to the weather, NCC's all campus will open at 10 a.m. tomorrow, January 17.
날씨로 인해 NCC의 모든 캠퍼스는 1월 17일 내일 오전 10시에 문을 열 예정입니다.’
‘아, 그곳에도 폭설이 내렸구나. 내가 아직 학교 알람 메일을 해지하지 않았구나’
몇년 전, 남편은 미국에서 해외 파견 근무를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남편을 따라 미 동부 펜실베이니아주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박사과정 하는 남편을 따라온 두 아이의 엄마 해경 씨를 만났다. 3년 먼저 와서 살고 있던 해경 씨는 나에게 다운타운에 있는 NCC 무료 영어클래스를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같이 일주일에 한 번씩 그곳에 다녔다.
선생님인 마이클은 교사로 은퇴한 뒤 이곳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마이클은 가끔 학생들 얼굴과 이름을 헷갈리긴 했지만 아주 친절하고 자상한 할아버지 선생님이었다.
적응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이대로 돌아가기엔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영어 공부를 하려고 사람들은 일부로 시간 내고 돈을 들여 어학연수도 오는데 나에게는 이번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들리기 시작하는 영어도 신기했고 한두 명씩 늘어나는 친구도 좋았다.
나 혼자 이곳에 좀 더 머무르며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남편이 허락해 줄까?
이곳에서 나 혼자 살 수 있을까? 이 궁리 저 궁리를 하면 할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지고 생각은 많아져 갔다.
TV를 보며 남편에게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아, 답답해. 도대체 쟤네들은 뭐라는 거야? 난 언제나 저 사람들과 같이 웃을 수 있을까?’
슬쩍 남편의 눈치를 살폈지만 남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말이 없었다.
한국에서도 남편의 직업상 외국인들과 모임이나 식사 자리를 해야 할 때가 가끔 있었다. 그때마다 정확하지 않은 발음과 단어로 소통하는 정도여서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실없이 웃기만 했고 그런 상황들이 너무 답답하고 싫었다.
남편만 이해해 준다면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남편이 동의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30년 결혼 생활 동안 부부싸움도 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며 각자의 의견을 존중하며 살았다.
나는 잘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오로지 세 아이들 양육과 집안 살림에만 전념했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독서 모임과 취미활동은 꾸준히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우리는 중년이 되었고 두 딸은 결혼해서 각자 가정을 이루어 독립했다. 아들은 군에 입대해 군 복무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니 엄마로서 해야 할 임무는 끝난 것 같았다.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싶었으나 이미 경력 단절 여성이 되어 있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자신감은 땅에 떨어졌고 상실감이 컸다.
일 년간의 파견 근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두 달 전 남편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 혼자 일 년만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 공부를 해 보고 싶은데 당신 생각은 어때요?”
남편이 놀란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신 혼자 이곳에 남겠다는 거예요? 혼자 살 자신 있어요? 만약에 급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건데? 아무래도 불안한 대요.”
“걱정 마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만약 위급상황이 생기면 루시아 언니나 최사장님께 도움을 청할게요. 또 한인회 회장님도 계시고요”
루시아 언니와 최사장님은 교회에서 만난 부부이고 미국에 이민 온 지 40년이 넘은 분들이시다.
그때 우리와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내가 살짝 운을 떼니 그분들은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적극 지지하고 응원한다고 하셨다.
마지막까지 남편이 동의하지 않으면 최사장님께 도움을 요청할 생각도 하고 있었다.
미 동부지역 한인회장님은 한인회에서 만난 분이신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도 주셨다.
“영어 공부는 한국에 가서도 할 수 있을 텐데, 꼭 여기에 남아서 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를 설득해 보세요.”
나는 두 가지를 말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부끄럽지 않고 자유롭게 영어를 배우고 싶어요.
또 하나는 일 년만 혼자 살아보고 싶어요. 혼자 지내며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요.”
남편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생각해 봅시다.”
다음날 남편이 말했다.
“솔직히 걱정이 많이 됩니다만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남편이 어렵게 동의하고 나자 그때부터는 나 자신도 조금 겁이 났다.
‘괜히 말을 꺼냈나? 정말 나 혼자 살 수 있을까? 공부가 너무 어렵진 않을까? 보험도 없는데 만약에 아프면 어떡하지?’
불안함과 기대감, 호기심은 가득해져 갔고 남편의 귀국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남편의 옷과 신발, 책 등 한국으로 가져갈 짐만 간단히 챙겼다. 집은 그대로 살기로 하고 계약을 연장했다.
떠나기 전날 밤 우리는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남편은 한국 시간으로 일요일 아침 7시, 나는 미국 시간으로 토요일 오후 6시에 매주 영상 통화를 하기로 한 것이다.
남편은 호기심 많은 나의 성향을 두고 불안한 듯 다시 재차 확인했다.
“정말 당신 혼자 지낼 자신 있지요? 조그마한 동양 여자가 너무 남의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아요. 이곳에서는 위험할 수도 있어요.”
“Yes, Of course. I can do it.”
활짝 웃으며 손을 높이 들고 자신 있게 외쳤다.
남편은 떠났고 나는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이렇게 나의 미국 어학연수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