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하늘 땅 바람이는 고원길’을 걷는다.
20년 전 진안 여행을 왔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작은 땅을 구입했다. 금강 상류 물줄기가 내려다보이는 그림 같은 마을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무 것도 없는 빈 밭에 접이식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앞산과 강줄기를 바라보며 행복했다.
“저기 저 산맥을 봐. 산들이 앞으로 다가오면서 색깔이 점점 진해지는 것 같지? 어쩜 산속에도 저렇게 다양한 색깔들이 있을까?”
남편이 말하면 나도 거들었다.
“강줄기는 산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서 흘러가네요. 그게 자연의 순리인가 봐요”
봄에는 쑥 캐고, 고사리 꺾고, 취나물을 뜯어 나물을 만들었다.
여름에는 상추, 고추, 가지 따서 쌈 싸 먹고, 무쳐 먹으며 초보 농부로 텃밭 농사를 배워갔다.
가을에는 고원길에서 만난 친구들이 밤을 가져다주고 서로 자기 산에 와서 감과 밤을 따가라 했다. 우리는 가을 산속을 헤집고 다니는 다람쥐마냥 알밤을 주워 모았다. 감을 따서 감식초 만들고 곶감 만들어 처마 밑에 걸었다. 으름과 꾸지뽕을 따서 발효액도 만들며 산촌 생활의 재미에 푹 빠져 산사람이 되어갔다. 그러다 우연히 진안에 걷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한에는 개마고원이 있고, 남한에는 진안고원이 있다’는 말처럼 진안은 땅이 높다.
진안 고원길은 해발 400m의 높은 산 속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옛날 고갯길을 이어 만든 길이다. 14개 구간이 있고 총 210Km이며 100여 개 마을과 50여 개의 고개를 지난다. 진안고원의 낮은 골짜기마다 낮게 엎드린 마을이 있고 그 마을에는 순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옛길을 걸으며 진안 사람들의 삶과 문화도 엿볼 수 있다. 주변 환경에 따라 맨발 걷기와 다도체험을 하며 힐링하는 시간도 갖는다.
고원길은 하늘과 땅 고샅고샅에서 마을과 사람, 진안을 만나는 길이다. 마을길, 논길, 밭길, 산길, 숲길, 물길, 고갯길, 신작로 등 첩첩산중 고원길을 천천히 느리게 걷는 도보문화여행길이다. 첩첩산중 고원 바람을 맞는 길이다.
고원길을 이끄는 대장은 걸으면서 지나는 마을 이름, 고개들의 유래와 역사도 이야기 해주었다. 우리 대장은 서울 '생명의 숲'에서 숲 운동가로 일했단다. 2008년 '마을문화 조사단'의 일원으로 진안에 내려왔고 옛길을 복원해 고원길을 만들었다. 그는 진안이 좋아 진안에 눌러살며 고원길을 이끄는 대장이 되었다. 매주 토요일 우리는 그를 따라 걷는다. 깔끄미재, 가래재, 도치재, 오얏고개, 엥겡이재, 감동마을, 황금마을, 마을마다 고개마다 이름도 사연도 참 정겹다.
나와 남편도 고원길 걷기에 등록하고 토요일은 어떤 약속도 잡지 않고 비워놓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주 토요일 걸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냄새로 느끼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혼자 걸을 때는 나를 생각하며 내 삶을 살피는 시간이 되었고, 같이 걸을 때는 동행하는 사람과 어울려 자연스레 친구가 되었다.
봄이면 앙상한 가지에서 뾰족뾰족 연초록 새잎이 돋아났다. 봄의 산속은 향기로운 숲 냄새로 황홀했다.
여름이면 초록이 우거지고 새들이 노래하고 시원한 바람이 춤을 추었다.
가을엔 어디를 바라봐도 결실의 풍성함에 눈이 호강했다. 빨갛게 익어가는 사과밭 사잇길을 걷고, 감과 대추가 익어가는 마을 돌담길을 걸었다. 들깨를 베어 깻단을 세워놓은 밭길을 지날 때는 고소한 들깨 향이 났다.
겨울 함박눈이 내린 날엔 산과 들, 나무 등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하얀 겨울 숲속에서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앞서가던 장난 끼 많은 사람이 커다란 나뭇가지를 흔들며 지나가자 뒤따르던 사람들이 눈 폭탄을 맞았다. '어이쿠' 깜짝 놀라 피하면서도 즐거워했고 바라보는 사람도 즐거웠다.
일 년 동안 사계절 없이 오로지 더운 날만 계속되는 방콕에서 살았다.
진안고원의 쾌청한 산속 공기와 냄새가 그리웠다.
방콕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고원길 걷기에 합류했다. 친구들은 제자리로 돌아온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가을 하늘은 하얀 뭉개구름을 팡팡 터뜨리며 좋아하고, 나무는 노랑 빨강 주황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를 반겨준다. 산들 바람도 신나서 우리 등을 밀어준다. 다시 고원길을 걷는 지금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하다.
*고샅고샅: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마다, 좁은 골짜기의 사이마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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