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퀘렌시아

느티야 내 말 좀 들어봐

by 루미상지
11월 초, 주천자연생태공원 사진 신인정

깜깜한 새벽, 조용히 일어나 길을 나선다.

어젯밤 비밀 친구가 보고 싶어 날이 새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우울하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 스트레스가 쌓일 때, 마음을 하소연할 때마다 비밀 친구를 찾아간다. 오늘도 비밀 친구를 만나러 간다.


몸과 마음이 어수선한 2025년 12월이다. 8월 말 방콕에서 귀국했을 때, 어머니는 허리 수술을 받고 재활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내가 없는 동안 동생들은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며 많은 고생을 했다. 나도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는 병원에 방문하기로 했다.


자식들 손을 빌리지 않고 자립적으로 사시겠다며 홀로 운동하고 몸 관리를 철저히 하신 어머니였다. 하지만 지금은 재활병원에 입원해 계신다. 나이에는 장사 없다고 언젠가는 어머니처럼 늙어갈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나이 들어가는 게, 늙어가는 게 서글퍼졌다. 눈 깜짝할 사이 올해도 벌써 12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 친구랑 카톡을 하면서도 ‘우울하다’는 말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남편이 곁에 있지만 혼자인 듯 외로웠다.

그 와중에 올해 남편의 송년회는 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1월 중순부터 12월 말까지 이미 예약된 송년회만 열 번이 넘었다. 뭘 그리 잊고 보내야 할 일들이 많아 그 많은 송년회를 하겠다는 것일까? 송년회는 혼자 조용히 스스로 한 해를 뒤돌아보고 성찰해야 하는 것 아닌가?


드디어 1차 송년회가 시작된 어젯밤 여섯 시,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고등학교 동창들과 송년회에 참석하고 좀 늦게 들어갑니다.’

‘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답장하고 기다렸다. 좀 늦은 밤이 지나고 열 두 시가 지났다. 다음날 새벽 한 시도 지났다. 그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걱정근심으로 가득한 내 정신은 더 초롱초롱해져만 갔다. 두 시가 한참 넘은 시간 만취가 된 남편이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다독이며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그리고 이른 새벽 자동차 키와 휴대폰만 들고 집을 나왔다.

새벽 여섯 시 짙은 안개가 낀 도로는 춥고, 어둡고, 으스스했다. 운전대를 꼭 잡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을 달려왔지만, 아직도 아침 해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둠 속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했다. 알싸한 바람이 볼과 귀를 스쳤다. 한숨을 크게 몰아쉬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편안해졌다. 저 멀리 희미하게 몇 명의 사람들이 보였다. 산책하는 사람과 새벽 물안개 작품 사진을 찍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었다.


잠깐 차를 멈춘 곳은 아름다운 새벽 물안개와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전문 사진작가들이 즐겨 찾는 진안군 주천면 자연생태공원이다.

상고대 - 사진 전은하


호숫가가 서서히 밝아오자 눈앞에는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온통 하얀 상고대 세상이다. 이른 겨울왕국이 나타났다. 지난밤 내린 서리는 호숫가의 휑한 나뭇가지와 마른 풀잎 위에 새하얀 서리꽃으로 피어났다. 고요한 호수에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서리꽃으로 하얗게 피어난 나무들 사이를 걷자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날이 밝고 안개가 걷히자 점점 익숙한 풍경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산속에 낯익은 작은 움막이 보이고 움막 옆에 서 있는 친구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친구는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서 있었다. 하늘 아래 구름과 산, 돌과 나무, 바람과 새들만 있을 뿐이었다. 친구는 지난여름 무성했던 초록 잎들을 모두 떨어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항상 제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내 말을 들어주는 비밀 친구는 바로 느티나무다.

가슴이 답답할 때, 마음이 불안할 때, 화가 나지만 점잖은 척하며 교양 있게 넘어가야 할 때, 심지어 큰 소리로 자랑하고 싶을 때도 친구를 찾았다. 무슨 일이든 어떤 말이 든 쫑알쫑알 친구에게만큼은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친구는 내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 내가 잘하고 있다며 항상 응원해 주었다. 아무 부끄러움 없이 민낯을 보여줄 수 있는 내 최고의 친구 느티나무.

친구에게 달려가 인사를 했다.

“느티야, 잘 있었어? 날씨가 추운데 견딜만해? 요즈음 내가 많이 우울했어. 그래서 너에게 자주 못 왔어. 미안해.”

느티는 차갑지만 상큼한 몸으로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늘 잘 있어. 여기는 춥지만 이곳이 편하고 좋아. 언제든 이곳에서 너를 기다릴게.’


싸늘한 초겨울 아침 햇살이 조금씩 밝아왔다.

“느티야, 내 말 좀 들어봐.”

느티를 안고 철없는 남편 흉을 한바탕 속 시원하게 봤다.

느티는 묵묵히 내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말한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송년회잖아. 만나고 싶은 사람 서운하지 않게 모두 만나야지. 올해를 잘 보내야 내년에도 알찬 새해를 맞을 수 있지.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집에 들어왔잖아. 만날 그런 것도 아닌데 한 번만 용서해 줘라.’

느티는 나를 이해한다고 내 편이라고 하면서도 덧붙인다.

‘인생은 다 그런 거야. 너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야. 너무 엄살 피우지 마. 오늘 저녁 남편에게 얼큰한 해장국으로 뼈다귀탕을 끓여주는 건 어때?’

차분해진 마음으로 느티나무 밑 의자에 앉았다. 커피 한잔을 들고 천천히 아껴가며 마신다. 저 멀리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본다. 늦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은빛 억새가 눈부시다. 거친 풍랑으로 일렁이던 마음이 점점 잔잔한 호수를 닮아간다. 이어폰에서는 조지 윈스턴의 ‘December’가 흘러나온다. 은은한 피아노 선율이 차가웠던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온다. 아랫마을 낮은 집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정겹다.

언제나 제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반겨주는 느티나무 친구가 있는 곳, 이곳에 오면 나는 자유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며 근심 걱정도 사라진다. 마법처럼 나를 착하게 만드는 친구 느티나무가 있는 곳은 나의 비밀 쉼터다. 누구에게나 이런 장소와 비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의 쉼터, 당신의 퀘렌시아는 어디인가요?



https://youtu.be/XKJRf98GU3o?si=VwmH3zIyKkBhdSDE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좋아요 꾸욱 눌러주세요.

https://omn.kr/2gg68




*퀘렌시아: 안식처 또는 애착장소. 투우장에서 소가 위험을 피해 잠시 숨을 고르는 피난처를 의미.

*상고대: 서리꽃. 대기 중의 수증기가 영하의 기온에서 나무나 풀에 얼어붙어 하얗게 변한 현상.










#퀘렌시아 #쉼터 #비밀친구 #느티나무 #상고대 #자연생태공원 #송년회 #물안개 #호수 #디셈버 December

#조지윈스턴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