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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이 나를 심각하게 만들 때

어제의 나는 원래의 내가 아닌 것을

by 양승광

Q. 40대의 작가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왜 나는 대단한 작품을 쓰려고 하는가”입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왜 나는 무리한 목표를 세워서 늘 나 자신을 엄격하게 다루는가” 하는 거죠. 작품을 발표한 지 오래되어 저는 늘 부담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 오랜 공백을 한번에 역전시켜보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엔, 저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을 제어하느라 늘 애쓰는 것 같습니다. 좋은 아빠이려고 하고, 좋은 남편이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런 책임감이 저 자신을 심각하게 만들어가고 있어요. 아주 가벼운 일, 예를 들면 의미 없는 수다, 시시한 영화 따위에 빠져드는 걸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아내는 결혼 전 제가 유머러스해서 반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저 자신도 모를 정도입니다. 어쩌면 무능한 아빠, 무능한 남편이 되는 걸 두려워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저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C. 사연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습니다. ‘나는 가벼워야 한다’는 명제에 자신을 묶어버린. 그래서 자신을 더 심각하고 갑갑하게 만들어버린.


질문을 봅니다. “왜 나는 대단한 작품을 쓰려고 하는가” 이를 바꾸어보자면 “왜 나는 만족스런 글을 쓰지 못하는가” 아닐까요? 그리고 그 원인을 작가님께서는 자신의 삶이 심각해져서라는 진단을 내립니다. 그런데 그 심각해진 원인.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려고 하는 부담감, 작품 공백기를 만회해야한다는 부담감에서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길어진 작품 공백기 이후의 대작에 대한 욕심. 작가라면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고 싶은 욕심과 책임감. 대부분의 아빠와 남편들이 갖고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 의미 없는 수다, 시시한 영화 따위에 빠져드는 걸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역시 당연하다고 여겨집니다. 왜냐? 벌써 작가님께는 그러한 수다가 ‘의미 없’게 되어버렸고, 그러한 영화가 ‘시시’하게 되어버렸으니까요. 이러한 상황이면 여기에 빠져드는 것이 한심하다 여겨지는 것. 당연하지 않을까요?


결국 이렇게 당연한 것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 왜일까요? 영화 ‘박하사탕’에서 나오는 명대사 “나 과거로 돌아갈래”가 떠오릅니다. 가볍고 자유로웠던 영혼을 가졌던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싶다는 느낌. 사연에 너무나 짙게 묻어납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는 듯 합니다. 과거의 나가 ‘과거’가 아닌 ‘원래’의 나로 여겨지시는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드는 당연하고도 일반적인 감정들이 자신의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겨지는 것.

영화 <박하사탕> 포스터


그런데 왜 작가님께서는 가볍고 자유로웠던 그 시절의 자신을 ‘원래’의 나로 생각하시는 걸까요? 사람의 성격은 나이와 생활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는데 말입니다. 혹시 작가님이 처음에 말씀하셨던 대작에 대한 욕심이 그 원인이 아닐까요? 그 욕심이 실현되지 못한 현실을 맞닥뜨리니, 그 미실현의 원인에 대해 골똘해지는데, 결국 그 원인을 ‘심각해진 나’에서 찾는 건 아닐까요? 예전의 나였다면 충분히 대작을 쓸 수 있었을텐데, 하는 마음. 그래서 예전의 나, 가벼운 나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 이런 마음이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부담감과 책임감을 삶의 장애물로 둔갑시켜버린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작가님의 삶이 한층 더 갑갑해진 것은 아닐까요?


답변입니다. 대작에 대한 욕심, 당연한지라 버리지도 못하고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면? ‘심각해진 나’도 괜찮다고 인정을 해주십시오. 처자식과 함께 살다보면 삶이 심각해질 수도 있고, 나도 인간인지라 작품 좋은 거 써서 대박 나고 싶은 거 당연하다고 인정을 해주십시오.


마지막으로 질문. 대단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 하나같이 가볍고 유머러스했답디까?


* 몇 년 전, 한겨레에서 토요섹션으로 <3D 입체 마음테라피>라는 제목으로 지면상담을 꾸린 적이 있습니다. 독자가 하나의 고민을 보내오면, 세 명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답을 하는 컨셉이었습니다. 여차저차한 이유로 저는 그 고민들에 대해 개인적인 답을 블로그에 포스팅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한 기념으로 그 때 쓴 글들을 여기에 옮겨 연재합니다. 참고로 이번 고민이 실린 원기사는 <‘즐거운 나’가 좋은 아빠·남편·작가>(누르면 이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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