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을 듣고 넘겨버린 내 자신에 화가 나요.
Q. 휴학 중인 여대생입니다. 전 친구들과 잘 지내는 편이고, 그동안 딱히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화를 살 일은 안 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지난해 학교에서 한 남자 선배가 제게 교수님 심부름을 대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땐 중요한 일이라 생각 못하고, 제 볼일을 먼저 보다가 선배로부터 ‘내가 만만해 보이냐’는 내용과 심한 욕설이 섞인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죄송하다’며 부랴부랴 시킨 일을 하러 갔지만, 알고 보니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을 시킨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땐 너무 황당해서 화도 못 내고 정신없이 행동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오니 선배가 인터넷 메신저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도 욕을 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하니 그 선배는 오히려 너는 욕을 더 먹어도 된다는 식으로 말해, 저 스스로 말을 말자 생각하고 메신저를 닫았습니다. 그 뒤 다른 일로 또 그 선배와 부딪쳤지만, 이런 사람과 부딪치면 손해라는 생각에 그냥 “네네” 하고 넘어갔습니다. 친구들에게 이 얘길 하면 왜 화를 안 냈느냐며 저를 나무랍니다. 하지만 저는 아마 화내라고 멍석을 깔아놨어도 잘 못 냈을 것입니다. 화내봤자 일만 커질 것 같았고 그럴 용기도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금방 잊혀지나 했었는데, 최근까지도 가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저를 괴롭힙니다. 그따위 모욕을 듣고도 그냥 넘기려 했던 제게 너무 화가 나고, 그 인간이 너무 미워 끔찍하게 죽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C. 어떠한 생각에 함몰되어 있을 때,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은 늪과 같아서 거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힘을 쓰면 쓸수록, 나는 그 안에 갇혀버리니까요.
사연에서 바보 같은 자신에 대한 한심스러움과 분노, 그리고 사건의 원인을 제공했던 그 선배에 대한 증오가 느껴집니다. 어떤 위로의 말도 해드리기가 어려울만큼.
그 선배는 아마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일겁니다. 타인의 실수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내가 만만해보이냐’는 문자), 이에 대해 타인에 대한 공격을 서슴치 않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본 글에서는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님께 집중하려합니다. 상담에서의 주인공은 님이니까요.
사연을 정리합니다.
첫째, 님은 그 선배에게 화를 내지 못했다 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말 화를 내지 않았을까요? 사과하는 선배에 대한 “그래도 욕을 하면 안 되지 않느냐”라는 말. 이것은 분노의 표출이 아닌 질문이었을까요? 또 어처구니 없는 선배의 발언에 대한 메신저 닫음. 그리고 다른 상황들에서의 선배를 회피 혹은 무시한 것. 모두 다 분명한 분노의 표출이었습니다. 물론 모두 정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당하건 부당하건 분노의 표출이라는 점에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둘째, 그 당시에는 금방 잊혀지나 싶었는데, 그런 사람과 부딪히면 손해라는 생각에 “네네”라고 잘 넘어가셨는데, 왜 계속 1년도 더 지난 일이 떠오르는 것일까요? 혹시 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의 왜 화를 안 냈느냐는 나무람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나무람을 들으니 자신이 정말 화도 잘 낼 용기가 없는 바보가 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화가 나고, 이러한 빌미를 제공한 그 선배를 죽이고 싶기까지 하고.
그런데 참 신기하죠? 분명히 자신은 그 당시에 명확한 분노를 표출했는데(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해야만 분노의 표출이 아닙니다), 어느새 화도 내지 못한 바보가 되어있다니 말입니다.
그럼 다시 한 번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님께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가 부여되어있다고도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님은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그 선배와 똑같이 욕설을 퍼부으셨을까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결코 현명하지 못 한 방법이니까요.
결국 “화내봤자 일만 커질 것 같”아 선택한 이성적 행동이 친구들의 평가로 순식간에 바보같은 행동으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친구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친구들 역시 그 이야기를 전해듣고서는 사건 당시에 님께서 가졌던 분노를 함께 한 것이니 말입니다. 그들과의 대화에서 취해야할 것은 평가가 아니라 님을 향한 옹호와 지지일 겁니다.
결론입니다. 님께서는 모욕을 듣고 그냥 넘기시지 않았으며, 정당한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그리고 님 주위에는 님과 함께 분노해주는 고마운 친구들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특정한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숨을 헐떡거릴정도로 운동장을 달려보심이 가장 좋습니다.
커버 이미지 : Photo by eberhard grossgasteiger on Unsplash
* 몇 년 전, 한겨레에서 토요섹션으로 <3D 입체 마음테라피>라는 제목으로 지면상담을 꾸린 적이 있습니다. 독자가 하나의 고민을 보내오면, 세 명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답을 하는 컨셉이었습니다. 여차저차한 이유로 저는 그 고민들에 대해 개인적인 답을 블로그에 포스팅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런치를 시작한 기념으로 그 때 쓴 글들을 여기에 옮겨 연재합니다. 참고로 이번 고민이 실린 원기사는 <분노 표출에도 훈련이 필요하죠>(누르면 이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