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내 자신이 싫어요.
Q. 수능을 보고 한달 반 남은 실기 입시를 준비중인 고3 예체능계열 수험생입니다. 저에게는 망상증이 있습니다. 제 또래 여자들이 자주 한다지만, 저는 생활에 큰 지장이 있을 정도로 병적입니다. 정말 쓸데없는 ‘헛된 망상’을 합니다. 머릿속에서 ‘제가 바라는 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아주 자세하게, 대사 하나하나까지…. 드라마 대본 수준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망상중에는 모든 걸 다 잊고 마약 먹은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그럴수록, 현실로 겨우 돌아왔을 때 그 괴리감을 참을 수가 없죠.
요즘은 제가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는 망상을 가장 많이 합니다. 보통은 그렇게 망상을 하면 ‘아, 이렇게 되도록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면서 노력을 하기 마련인데, 의지가 부족해서 항상 실패하고 또 망상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결국 그런 제 현실이 너무 싫어지죠. 그럴 때마다 전 ‘저렇게 되고 싶은데, 난 왜 이럴까? 또 망상만 하며 시간 허비하고…’ 하며 자기 학대를 합니다. 그러면 이상하게도 묘한 안도감을 느끼고, 다시 망상을 하며 자기 위안을 합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죠. 책상 앞에만 앉으면 습관처럼 주체할 수 없이 10시간 정도 망상에 빠진 적도 많습니다. 고1 때부터 점점 심해져 지금이 최고조인 것 같습니다. 현실은 외면한 채 환각 속에서만 살아가는 알코올 중독자 또는 마약 중독자와 다름없다는 생각에, 가장 노력해야 할 중요한 시기인 요즘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자살할 용기도 없고, 어차피 현실에서 살아야 한다면 더 이상… 이렇게 살기 싫습니다.
C. 망상증. 병적. 쓸데없는‘헛된 망상’. 마약먹은 것처럼. 괴리감. 실패. 허비. 너무 싫어지죠. 난 왜 이럴까. 자기학대. 묘한 안도감. 알코올 중독자. 마약 중독자. 살기 싫다. 자살할 용기. 짧은 사연에 나온 가슴 아픈 단어들. 얼마나 괴로울까. 내 글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조심스러운 마음 주저주저하다 키보드에 손을 얹습니다.
사연에서 ‘강압’과 ‘응징’을 봅니다. 가장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라는 생각이 하나의 명령으로 되고, 그 명령에 대한 소극적 반항으로 상상에 빠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상상에 빠졌을 때 자기학대를 함으로써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하나씩 풀어봅니다.
‘강압’은 명령-반항의 순환을 말합니다. 강압의 상태에서는 자신이 원해서 선택한 것도 어느새 하나의 명령이 되어버립니다. 욕구가 의무로 변해버리는 거죠. 그리고 이러한 명령에 대해 반항이 이루어지는데,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소극적 반항입니다. 꾸무럭댄다거나, 공상에 빠진다거나, 망설인다거나, 주의를 산만하게 흐트러뜨린다거나.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결국 의무화된 욕구를 원상태의 욕구로 돌려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제가 쓰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고 싶니? 안 해도 된다. 하고 싶으면 해도 되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 행동의 선택권을 자신에게 넘겨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행동을 하는거죠. 이 과정에서의 전제. 우리 삶에서 반드시 해야할 일이란 건 없다는 거죠.
‘응징’이란 근엄한 도덕화로 말미암아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고서도 죄책감을 느끼고 자신을 몰가치화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책감은 자신에 대한 처벌 혹은 학대로만 가라앉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는 방법 중에 한 가지는 자신을 제3자화 시키는 것입니다. 제3자가 그러한 행위를 하였을 경우에, 자신이 그에게 동일한 비난을 가할 것이냐 자문해보는 것이죠. 이러한 질문에 대해 ‘NO'가 나온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그러한 처벌을 할 필요는 없게 됩니다.
답변입니다. “실기시험 준비를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라는 당위명제를 버리고 “지금 이 순간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겁니다. 또 자동스럽게 가해지는 자기비난에 적극적으로 반박을 해주세요. 그 비난이 정당한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주시고, 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품는 관용을 자신에게도 베풀어주세요.
물론, 당위명제를 버리는 것부터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할겁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 한 행복은 나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 몇 년 전, 한겨레에서 토요섹션으로 <3D 입체 마음테라피>라는 제목으로 지면상담을 꾸린 적이 있습니다. 독자가 하나의 고민을 보내오면, 세 명의 전문가들이 각자의 답을 하는 컨셉이었습니다. 여차저차한 이유로 저는 그 고민들에 대해 개인적인 답을 블로그에 포스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쓴 글들을 여기에 옮겨 연재합니다. 참고로 이번 고민이 실린 원기사는 <‘나’에게서 나와 도움을 청하세요>(누르면 이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