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오랜만에 대학선후배모임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그 모임의 회장이지만 나이가 젤 어리다 보니(제일 나이가 많은 선배님과는 10살 차이가 난다) 어려워서 나대지는 못하고 선배님들이 모임을 요청하면 계획을 잡는다. 그러니까 나는 선배님들이 모임을 원활히 가져갈 수 있도록 스케줄 잡고 회비 걷고 비용 처리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주로 나이가 제일 많은 H선배님이 모임을 요청한다. 그러면 아랫것들은 군말 없이 따른다. H선배님은 그런 우리를 기특해 하며 "죽을 날이 가까워서... 자주 보려고 한다... 앞으로 몇 번이나 보겠어..."라고 바쁜 와중에도 나와 주어 고맙다는 말을 이렇게 대신한다.
우리는 사느라 바빠서 마음은 있어도 선뜻 모이지 못하는데 선배님이 이렇게 라도 암암리에 푸시를 함으로 그나마 모임이 유지되니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의 아지트는 홍대 앞에 있는 작은 식당이다. 막걸리, 맥주, 해물전과 만두전골 등을 파는데 식당 분위기가 독특하다. 벽에는 과거 시민운동을 했던 주인장이 존경한다는 빅 사이즈의 체게바라 포스터가 당당히 붙어 있고 환경운동이나 시민운동 관련 포스터나 액자들이 걸려 있다.
이 식당은 선배 중의 지인이 운영하는 곳이기도 하고 분위기가 편하고 비용이 저렴하다 보니 계속 여기서 모이게 되었다. 17명 중에 12명가량 나오는데 그때그때 멤버가 조금씩 바뀌어 나온다.
이 날은 10명이 나왔고 석 달만에 만났으니 적당히 반갑다.
이 집의 대표메뉴인 만두전골과 파전은 막걸리와 아주 잘 어울린다.
건커니 자커니 하면서 회포를 푸는데 내 옆에 앉은 선배, 평소 유머스러워 좌중을 잘 웃기는 K선배가 팔뚝으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물었다.
"어이! 이경아~ 너 요즘 잘 지내고 있는 거냐?" 그는 대학교 선배지만 친오빠의 친구이기도 해서 편하게 이름을 부르고 다른 선배들에 비해 좀 더 가까운 편이다.
"어~네! 잘 지내고 있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K선배는 고개를 약간 갸웃하면서 " 정말이야?" 하며 눈을 치켜뜨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정말이죠. 그런 걸 왜 거짓말을 해요. 전 힘들면 힘들다고 해요" 하고 맘에 없는 아니 거짓말을 했다.
별거에 들어 간지 서너 달 밖에 안 됐고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거의 다 왔다. 바닥에 조금 깔려있을 뿐이다. 나는 마지막 앙금을 씻어내느라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그러나 아닌 척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선배가 "너 이혼은 했냐 안 했냐?"라며 예상치 못한 돌직구를 날렸다.
조금 놀랐지만 친오빠의 친구니까 이 정도는 애교로 넘겨준다.
"왜요?"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지 나도 궁금했다.
"사람들이 그러던데... 네가 이혼을 안 하는 이유가..." 느닷없는 돌직구로 좌중을 긴장시키더니 이번에는 말에 뜸을 들인다. 나는 숨을 참고 조심스럽게 침을 삼켰다. 긴장한 것이다.
'사람들? 누가 내 이혼에 대해 왈가왈부한다고?' 나는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라서가 아니라 겨우 8부 능선을 지났는데 사람들은 아직도 나와 남편을 한 묶음 생각한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사람들이 뭐라는데요" 나는 볼멘소리로 물었다.
"... 네가 이혼을 안 하는 것이... 기다리는 것이라며? 재결합을?" 선배는 내 목소리를 의식한 듯 눈치를 살피며 아까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잉?? 누가 그래요? 재결합이요??"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 기가 막혔다.
그리고 맥이 빠졌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이 보였으면 이런 소문이 났을까 싶었다.
나를 아주 바보천치로 아는 게다. 바람난 남편을 기다리는 얼빠진 아낙으로...
할 말을 잃었다. 동문들 사이에서 그런 소문이 돌고 있나 보다 생각하니...
"아니에요. 선배. 절대 아니에요. 절대 아니라고 전달해 주세요. 나 바보 아니에요."
나도 모르게 선배의 팔뚝을 꽉 붙잡고 짓 누르며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지? 그래 알았어. 안심이다." K선배는 내 등을 쓰다듬듯 몇 번 두드리며 말했다.
K선배는 내 단호한 내 말과 태도에 조금 놀랐는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앞자리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선배들도 숨죽여서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다.
"너 하고 내가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는데... 내가 이제껏 기다렸는데... 나한테도 기회를 좀 주라."
분위기가 진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K선배가 평소같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나를 비롯해 주변의 선배들이 "뭐야!" 하면서 피식거렸다. 다들 눈치를 챘다. K선배의 의도를...
나도 그 농담으로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선배는 안 돼요."
"왜 난 안돼?"
"선배는 임자가 있잖아요. 난 남의 거에는 관심이 없어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나도 진심이 들어간 농담을 던졌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나도 혼자가 되지 말라는 법 있냐?" 선배가 여전히 실없는 농담을 이었다.
"그럼 혼자가 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나도 끝까지 응수했다.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잠시 이상한 기류가 흘렀던 분위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갔다.
내 의중을 알고 싶었던 게다. 당신들이 알고 싶었던 건 그거지.
내가 이혼을 하지 않는 이유. 나도 알고 있었다. 그들이 그걸 궁금해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사실은 나도 궁금하다.
내가 이혼을 안 하는 이유가...
그 이유가 너무 여러 개여서 어떤 것이 진실일까가 스스로도 궁금하다.
경제적 이유? 혼자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남들의 이목? 외로움?... 등등등...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거의 해소 내지는 해결이 되었다.
그래서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복수심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내 인생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게 남편이 내세우던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결국 그 이유는 자신의 불륜을 은폐하기 위한 꼼수적 발언이었다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불륜은 100% 들킨다. 언젠가는 반드시... 시간문제일 뿐이다.
나는 남편에게 속은 것이 분했었다. 그래서 처음엔 완강히 저항했다.
"절대로 이혼 못해. 내 인생에 이혼이란 없어. 꿈도 꾸지마!"라고 분개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슬프게도 사실이었다. 나는 실제로 이혼에 대해 준비가 전혀 안돼있었다.
내가 완강히 거부하자 남편은
"나는 준비가 다 끝났어요. 당신도 준비되면 언제든지 말해요."라고 일부러 존댓말을 써가며 비아냥 거렸었다. 그 말에 속이 메스꺼워 토할 거 같았다.
남편은 틈만 나면 이혼 요구를 했다.
빈정거리고 무관심하고 무시하다가 내가 언짢은 태도를 보이거나 언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면
"그러니까 이혼하자고. 우리는 이제 밑바닥까지 다 본 사이야. 깨진 유리라고... 다시 붙일 수 없어..."라며 가스라이팅을 했다.
'깨진 유리는 너지 내가 아니야. 너 스스로가 너를 깬 거야. 너 스스로 아는구나. 나한테 절대로 되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더러워진 몸이니까...'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별 모욕을 다 주어도 이혼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급기야는
"그래 좋아. 이혼하지 마. 나중에 네가 이혼하자고 할 때 그땐... 그땐 내가 안 해 줄 거야!"라며 눈을 부릅뜨고 협박을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온몸이 부들거리며 치가 떨렸다. 그리고 이건 또 무슨 꼼수인가 싶었다.
'도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사람을 이런 쓰레기로 만들어놨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고도 당장 법원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내가 이혼을 하지 않는 이유? 지금 당장은 알 수 없다.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이 누구에게 더 유리할지를...
내면의 정서적 결여를 가리기 위한 핑계며 발버둥 같지만... '두고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