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민호와는 저녁 식사를 한 후 카페에서 한 시간가량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고 헤어졌다.
주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분위기는 훈훈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고 말이 적다 보니 대화가 끊기고 침묵이 흐르는 시간이 몇 번 있었다.
민호의 사생활에 대해 섣불리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신상에 관해 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민호가 학창 시절에 대해 말하면 듣고 있다가 "아~그랬구나..."라며 반응해 주는 정도가 다였다.
내가 말 수가 적은 사람이란 걸 눈치챘을 것이다. 내 보기엔 민호도 말이 많은 편이 아닌 거 같았고 분위기를 띄우거나 맞추기 위해 허풍이나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아닌 거 같았다. 조용조용하고 꾸밈이 없고 담백했다.
"너는 어땠어? 고등학교 때?" 하고 민호가 물으면 나는
"너무 평범해서...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라고만 대답했다.
들어 보니 민호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꽤 열심히 잘했던 모양이었다. 박사 학위도 있다고 하고. 대학교수로 잠깐 근무하다 부친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업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사업가보다는 교수가 더 어울릴 거 같은 분위기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부인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의 가족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면 내 얘기도 해야 될 거 같아서 듣고만 있었는데 민호도 나의 가족에 관해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어쩌면 오빠에게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를 만나고 그의 격조 있는 태도에 기분이 좋아졌다. 잘 자랐구나... 아니 잘 살았구나... 너는...
일단 민호는 잘 산 거 같아 기분이 좋았다. 지질한 놈으로 나타났으면 화가 났을 것 같았다.
너나 나나 하면서...
다음 만남은 기약하지 않고 헤어졌다.
강화도 생활을 정리하고 정선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순영언니와 영미한테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핑계를 찾지 못해 가슴이 먹먹했다.
정선 얘기를 듣고 난리 칠 두 여자를 생각하면...
"야! 너 요즘 뭐 하고 다니는데 연락이 없냐?"
미영이가 전화를 걸어 난데없이 소리를 질렀다. 연락이 뜸했던 건 미안했지만 성질머리 하고는 그렇다고 화를 낼 건 뭐람... 온 동네 소식을 다 꿰고 있어야 맘이편한 미영이다.
그런 미영이에게 일주일이나 연락을 안 했으니 제 딴에는 몸과 입이 근질근질했을 것이다.
"나도 바빠. 너만 바쁜 줄 아니?" 나는 딴청을 피웠다.
"혼자 사는 네가 바쁠 일이 뭐 있냐. 순영언니하고 같이 밥이나 먹자. 나와."
밥 먹자는 말이 이렇게 부담스럽게 들린 적이 없었다. 만나면 정선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좀 이른데... 마치 죄나 지은 사람처럼 피하고 싶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