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정선의 가을은 세상 어느 곳 보다 아름다웠다.
그 해 가을이 일찍 찾아온 탓에 단풍이 예년보다 울긋불긋했다. 이곳 주민들은 단풍 구경을 특별히 떠나지 않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아름다운 단풍을 매일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 단풍을 놓칠세라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
나도 집을 둘러친 주변 산의 아름다운 단풍에 취해 한두 시간씩 따뜻한 커피 잔을 들고 마당을 서성거리다 한기가 들라 칠 때쯤 실내로 들어온다.
집안 정리도 틈틈이 하면서 무료할 땐 동네 주변도 살필 겸 산책을 하고 오면 하루가 잘 간다.
참! 아직까지 하지 못한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중요한 얘긴데 미처 하지 못했다. 산책이라는 말을 꺼내니 이제야 비로소 생각이 났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나가면 '동강'이 있다. 동강은 국내 생태계 최고의 보고 이자 뛰어난 비경을 자랑하는 사행천이다. 사실 내가 이 집을 살 때 집 가까운 곳에 이렇게 유명한 강이 있는 줄 몰랐다.
집을 사고 나서 좀 여유가 생겨 주변을 둘러보다가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정선읍을 나가려면 구불구불한 이 아름다운 강을 끼고 50분쯤 가야 한다. 이 길은 강 건너편에 깎아지른 산을 끼고 있는데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비경이어서 약간 동남아나 중국에 온 것 같은 이국적인 모습이다.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다.
첫 해 가을은 정선의 정취에 취해 날짜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그러면서 별거에 대한 상처도 서서히 아주 조금씩 아물어 갔다. 나는 이 상처가 하루빨리 낫기를 바랐지만 내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쉽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저 시간이 흐르기 만을 바라는 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픔을 잊기 위해 억지로 뭔가를 한다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 치를 않았다.
잊기 위해 또는 씻기 위해 내지는 내려놓는다는 명목으로 그 어떤 에너지도 쓰고 싶지 않았다. 예를 들면 잊기 위해 책을 읽어야지라든가 내려놓기 위해 명상을 해야지라든가 하는 식의...
그냥 숨만 쉬는 것도 힘들었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애까지 쓴다면 몸이 산산이 부서져 버릴 거 같았다.
그래서 상처나 아픔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말자고 매일 다짐했다.
가까스로 벗어난 것이 어딘가 싶었다. 못 빠져나올 줄 알았거든. 사력을 다했다.
그때 이미 힘을 다 써 버려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
아마 그래서 생각보다 빨리 회복이 되고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밑바닥 끝 갈 때까지 내려갔기 때문에 그다음엔 죽거나 기사회생하거나 두 가지 길 밖엔 없었다.
다행히도 포기하지 않았고 나도 미처 몰랐던 회복탄력성이 내재되어 있었는지 삶의 터를 옮기고서야 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