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하거나 전화가 걸려 오면 첫마디가 다짜고짜 "야! 넌 손가락이 부러졌냐?"이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번득 든다. '아고, 또 전화를 안 했네...'
미리미리 입막음을 좀 해둬야 하는 건데 늘 생각이 많아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드니까 주변에 신경을 못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난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그렇게 궁금하지 않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지도 궁금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내가 먼저 폰을 열고 누군가의 일상이 궁금해 안부를 묻는 일이 엄청 어렵다.
한 번은 미영이에게 전화가 왔는데 "야! 너 손가락이 부러졌냐?"라고 소리를 질러서 정말 깜짝 놀랐다.
엄마와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둘이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말을 하는지... 내가 더 놀랐다.
그 정도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화를 안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그러다 보니 점점 집 안에 벨 울리는 건수가 줄어든다. 어느 땐 좀 쓸쓸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도 없는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진 않는다.
쓸쓸하면 아!~ 좀 쓸쓸하네... 심심하면 아!~ 좀 심심하네... 그러고 만다.
내 쓸쓸함이나 심심함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그들의 일상을 방해하거나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우울증은 아닌 거 같다. 우울하지는 않으니까...
워낙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해서 우울하지는 않다. 그리고 또 잘 맞는 사람이 없다 보니 내 우울함이 그들의 에너지로 채워지거나 벗어나 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는 날은 그 괴리감에 공허함이나 허탈함이 더 밀려와 기진맥진해 버린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들어 오는 날은 신발을 벗자마자 거실의 소파에 스러지듯 누워 멍 때리기를 한두 시간 정도하고 나서야 제정신이 든다.
대체 내가 밖에서 무얼 하고 온 건가... 싶은 거다.
그 공허함이나 허탈함을 느끼는 것이 너무 싫어서 점점 사람들을 피하고 있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책을 읽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이 내 성미에 맞는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나면 에너지가 채워지는 것 같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 때문에 끊임없이 그들 주변을 맴돌며 존재감을 확인하려 드는 짓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인정한다고 해서 내 삶이 더 윤택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니까.
비록 손가락이 부러졌느냐는 비난을 받을지언정 내가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면 그런 부탁까지 매몰차게 뿌리치지는 않는다. 도움은 그야말로 순수한 봉사니까 거기에 어떤 사심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능력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그 외 여타의 쓸데없는 만남은 정말 나를 힘 빠지게 하므로 될수록 지양한다.
그러고 산다.
민호에게 전화가 왔을 때도 그랬다.
"내가 연락 안 하면 먼저 연락 안 하는구나"
질책하는 거 같아 그때 내가 먼저 실토했다.
"웅... 나 원래 손가락이 부러져서... 먼저 연락 잘 안 해"
내 말에 민호가 한 참을 웃었다.
"잘 지내지?" 민호가 물었다.
두 어달 만에 연락을 했는데 그 사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호는 전혀 모른다. 정선으로 이사를 했다고 말을 해야 할지 어떨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물론 정선으로 이사 한 사실을 안다고 한 들 그에게 미칠 영향은 전혀 없지만... 다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산골에서 혼자 산다고 하면 너무 놀라거나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 어떡하나 하는 부분이었다.
"잘 지내고 있어. 너는?"
"난 미국 왔다 갔다 하면서 조금 바빴는데 지금 좀 여유가 생겼어. 얼굴 좀 볼까?"
어쩌나 서울로 나가려면 시간이 꽤 걸리고 만나더라도 잠시잠깐 이어야 할 텐데... 그리고 요즘 날씨가 점점 추워지니까 오랜 시간 집을 비우기도 불안하고... 서울 갔다가 밤에 들어오는 것도 무섭고...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시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민호는 내 대답이 늦자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너도 바쁘구나?" 서운함이 느껴졌다.
이쯤에선 말을 해야 할 거 같았다.
"사실은 내가 이사를 했어"
"아 그래? 그 사이에? 어디로?"
"정선으로..."
이번엔 민호가 말이 없었다. 잠시. 놀랐는지 말이 없다가 잘 못 들었나 싶었는지 확인하려는 듯 되물었다.
"강원도 정선 말이야?"
"웅"
"헐~"
저으기 놀라는 눈치다.
민호는 내가 별거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빠가 말했겠지. 그런데 별거를 하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혼자서 정선으로 이사를 했다고 하니까 너무나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나를 이상한 사람?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겼던 것 같다.
남편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사람을 피해 도망치듯 산골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전혀 아닌 건 아니었지만 그것이 또 크게 작용을 해서 정선으로 이사를 한 것은 아니었는데...
남편하고 살 때부터도 전원생활에 대한 로망이 컸었고 부부가 함께 전원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꿈은 깨졌고 내게는 버킷리스트였고 그래서 혼자라도 그 로망을 이루고 싶어 들어온 것이었는데 그런 사정에 대해 민호에게 일일이 설명을 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