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강화도도 그렇고 정선도 그렇고 시골 생활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 때는 농번기와 농한기의 구분이 뚜렷한 줄 알았다. 그래서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나면 그때부터 확실한 농한기로 접어들어 겨우 내내 할 일 없이 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골에서 살아보니 겨울 농한기라고 해서 절대로 쉬거나 노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만 풀과의 전쟁만 없다 뿐 겨울은 겨울대로 내년 봄을 준비해야 작업들이 많았다.
우리 마을의 이장은 겨울에도 만나 볼 수 없을 정도로 바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겨울 동안 연탄 나르기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러니까 투잡에 이장 일 까지 쓰리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오면 트랙터를 개조한 제설차로 동네 곳곳 좁을 골목까지 쌓인 눈을 치우는 일도 이장이 할 일이다.
이장은 가끔 내게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고 어려운 일이나 부탁할 일은 없는지 체크를 했다.
혼자서 귀촌을 한 주민이 있으니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나 사고가 생기지 않을까 꽤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성실하고 리더십이 있는 이장을 동네 주민들이 많이 신뢰하고 따랐다. 그런 이장이 턱 하니 뒤에서 내 울타리 역할을 해주니 동네에서는 나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주민들은 내게 호의적이었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장이 나에 대해 좋게 말하고 다닌 덕분이었다.
가을 추수 때쯤 도와줄 일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이장이 우리 집을 방문했었다.
"별일 없으시지요?" 이장은 집 주변을 둘러보며 안부를 물었다.
"아~네 아직까지 특별할 일은 없네요." 사실, 겨울에 거실에서 땔 장작이 필요해서 부탁을 할까 하다가 좀 더 후에 해도 될 거 같아 미루어 두기로 했다.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시고요. 아직까지는 뱀 조심하십시오"라고 이장이 말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뱀을 못 봤어요." 나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로 정말 이사 와서 지금껏 뱀을 한 번도 못 봤다.
강화도에서 살 때도 거기도 분명 시골인데 뱀을 한 번도 못 봤었다.
소현이 할머니와 산책을 할 때도 그녀가 갑자기 "뱀이다. 뱀..." 하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나도 따라 얼음이 되었다가 "어디요? 어디?" 하고 물었을 때는 이미 뱀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뱀이 내 눈길보다 빠르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뱀도 도망갈 때는 어느 동물 못지않게 민첩했다.
소현할머니와 산책을 할 때 몇 번 그런 일이 있었서도 나는 뱀을 보지 못했다.
그때도 잠깐 나와 뱀이 상극인가? 뱀이 내 눈에 보이지가 않네... 했었다.
그런데 정선에 와서 여름 내내 지냈어도 뱀을 보지 못했다.
내가 지금까지 뱀을 못 봤다고 하니까 이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뱀이 어떻게 생겼나 모르는 거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 말에 "네에?" 하면서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내가 도시에서만 살다 온 사람인 줄 알기 때문에 뱀을 못 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이장이 워낙 유머스러워서 농담을 던졌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장의 말이 너무 웃겨서 이장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혼자서 한참을 웃었다.
세상에 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라면 모를까. 그런데 그런 유머를 던질 정도로 사람이 여유가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장은 뱀 조심하라며 꼭 장화를 신고 다니라고 단단히 이르고 갔다.
장화를 신으라고 할 때 "아, 뱀이 장화는 못 뚫으나 봐요?" 하고 물었다.
"그것도 그렇고 뱀은 체온으로 감지를 하는데 장화를 신으면 체온을 차단해 주니까 괜찮습니다."
"아하!" 나는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할 때나 평소에도 장화를 신고 다니는 이유를 그때 정확히 알았다.
이장을 잘 만나서 귀촌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12월 말경 산골 학교에도 어김없이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사실 동네에서 초등학생은 이장의 하나밖에 없는 딸냄이 현정이가 유일하다.
이장은 나 보다 한 살이 많으며 막 오십을 넘었다. 그런데 그에게 초등학교 3학년 생인 딸이 하나 있다.
이장의 아내는 필리핀 사람이다. 이장은 필리핀 여인과 결혼을 해서 10년 만에 어렵게 딸 하나를 낳았다.
이장은 아내를 무척 사랑하고 아꼈다.
이장은 밖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을 때 주변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어~사랑하는 자기야 무슨 일이야?" 라며 전화를 받는다.
나는 처음에 장난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장난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말끝마다 "사랑하는 자기야..."라는 말을 붙였다.
그리고 여는 시골집 부부 같이 농사 일도 같이 하지 않았다. 현정이 엄마는 살림을 하며 현정이를 키웠다.
결혼을 하고 난 뒤 이장의 어머니가 이장의 아내를 구박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집안일이나 농사일 도 잘 못하고 게으르다며. 그때 이장은 어머니 집에 발길을 끊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번 크게 어머니를 받아치고 난 뒤로 어머니는 더 이상 외국인 며느리를 구박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우리나라에 시집을 온 외국 여자들 중에서 이장의 아내가 제일 시집을 잘 왔다고 말했고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장이 아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며 그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겨울 방학이 되었을 때 이장이 부탁이 있다며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장이 내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의아했는데 다름 아니라 방학 동안 현정이의 공부를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책 읽고 글 쓰고 음악 듣고 TV를 보는 일 밖에 딱히 하는 일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 부탁이 되려 반가웠다.
현정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이장의 아내도 동네 카페나 공공일자리 등의 아르바이를 했는데 내가 이사 오고 난 후 가끔 정현이를 내게 맡기거나 스쿨버스에서 픽업하는 일등을 부탁받았기 때문에 현정이와 나는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일을 나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현정이는 저녁때까지 집 안에서 혼자 지내야 했다. 동네에 친구도 없고 산골에서 어린아이가 밖에서 노는 일은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런던 중 내가 이사를 오고 난 후 내게도 현정이에게도 서로 말벗이 생긴 셈이었다.
현정이가 나를 잘 따랐다.
현정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만화 주인공 캐릭터를 그렸다.
어느 날은 나를 그려 주었다. 눈도 크고 턱도 뾰족하게 어찌나 이쁘게 그렸던지 칭찬을 많이 해주고 그 그림을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이장이 현정이 공부를 부탁하러 왔을 때 표정이 하도 심각해서 나는 크게 나쁜 일이 있는 줄 알았다.
현정이 아빠는 현정이가 너무 공부에 관심이 없다며 한 걱정을 했다.
방학 전에 학교에 불려 가 엄마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특히 국어를 어려워하고 어휘력도 딸리고 다른 과목도 많이 뒤처진다는 담임선생님 상담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현정이 공부를 봐주면서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이장은 그제야 이마의 주름이 펴지면서 표정이 밝아졌고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아침 11시쯤에 현정이가 보조 가방에 숙제나 문제집 등을 넣어 우리 집으로 왔다. 엄마가 우리 집까지 태워다 내려 주고 가는 것이다. 이장네 집과 우리 집은 300m도 안 떨어지게 가까웠지만 걸어오는 동안 혹여 짐승이나 뱀을 만날까 봐 태워다 주는 것이다.
현정이가 공부를 하러 온 첫날 현정이와 조금 더 깊게 대화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정아~ 현정이는 꿈이 뭐야? 나중에 어른이 되어 하고 싶은 일이 뭐야?"라고 물어보았다.
현정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하고 싶은 게 여러 개라고 하면서
"화가, 가수, 승무원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세 개다 좋은 직업이라고 말해 주고는 그중에서 뭐가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았다.
"화가요."
역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더니...
나도 현정이가 그림을 잘 그리고 좋아하니까 화가의 꿈을 키우는 것도 괜찮은 거 같았다.
그런데 조금 후에 현정이는 "그런데 선생님, 저는 화가의 꿈을 버렸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듣자마자 버렸단다.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왜? 화가의 꿈을 왜 버렸어?" 하고 물어보았다.
"학교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선생님이 오셔서 정현아 너는 그림을 아무리 잘 그려도 소용없어라고 말했어요. 왜 요하고 물어봤더니 화가도 공부를 잘해야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화가의 꿈을 버렸어요"
정현이는 결코 어휘력이 달려 말을 못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차근차근 설명도 잘하고 질문도 무척 많은 아이다. 정현이의 대답을 듣고 난 머릿속이 하얘졌다.
담임선생님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공부 시간이든 노는 시간이든 그림을 끄적거리고 있는 현정이가 걱정스러워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협박 같은 으름장은 너무 도가 지나친 것 같았다.
초등학교 3년생인 정현이가 받아들이기에는 좀 힘든... 현정이는 선생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곧바로 화가의 꿈을 버리고 말았다.
공부 잘하는 아이만을 우대하는 학교 분위기에서 여타 다른 재능이나 관심을 갖는 아이는 인정받기 힘든 교육 정책이나 현실에서 산골에서 화가로서의 꿈을 조용히 키우고 있던 마음 여린 아이는 크게 상처를 받고
가장 좋아하던 화가의 꿈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냥 꿈을 버렸다는 그 말 자체에 슬펐다.
어린아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