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정선 집을 샀을 당시 그 집의 보일러는 심야전기보일러였다.
나는 심야전기보일러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기름보일러나 가스보일러는 사용해 봐서 아는데 심야전기보일러는 얼핏 들어만 봤지 본 적도 사용해 본 적도 없었다.
밤중에 사용하지 않는 전기를 이용해 열을 비축해 놓았다가 낮에 난방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라고 하는데 전기세를 절약할 수 있어서 시골에서 많이 사용하는 난방 방법이라고 한다.
보일러실에는 엄청난 크기의 심야전기보일러와 온수 보일러 두 개가 들어가 있어서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 서 있을 정도의 공간 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이 보일러가 고장이 잦았다. 시골에서는 이런 설비가 고장 났을 때 기사를 부르면 하루만 불러도 40~50만 원 이상 수리비를 지불해야 한다.(부르는 게 값이다) 한 겨울에 한 번 부르면 50만 원에 전기세 40~50 만원 정도 들어가니까 배보다 배꼽이 더 크고 만약 두 번 고장이 난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난방비로 한 달에 백만 원 이상이라니...
고민 고민하다가 석유 보일러로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하고 나서 보일러 업자를 불러 견적을 받아 보니 간단하게 보일러만 교체할 문제가 아니었다. 우선은 심야전기보일러를 보일러 실에서 꺼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백만 원 가까이 들고 보일러 실을 수리하는 비용이 또 백만 원, 석유 보일러를 설치하는 데는 삼백만 원 가까이 들었다. 인건비까지 계산해 보니 총비용이 육백만 원이었다.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지만 길게 보기로 하고 바꾸었다.
덩치 큰 심야전기보일러와 온수 보일러를 해체해서 꺼내 버리고 조그만 석유 보일러와 석유통을 들여놓으니 보일러 실에 공간이 많아져서 창고 겸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석유보일러로 교체해 놓았는데 중동의 내전으로 갑자기 석유 가격이 올라가 버렸다. 게다가 전례 없는 강추위가 불어 닥쳤다. 이런 걸 보고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해야 하는 게지...
하루에 기름을 얼마나 사용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석유통에 눈금 표시를 하는데 하루에 20L 정도 들어가는 거 같은데 문제는 하나도 따뜻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루에 그 정도로는 단열이 엉성한 황토집을 데우기는 역부족인 거 같았다. 한 달을 사용해 보니 50만 원 정도 석유를 샀다.
(주유소에 전화를 하면 원하는 시간에 주유차에 기름을 싣고 와서 투뷰를 통해 석유통에 석유를 채워 넣어 준다.)
50만 원어치 석유를 떼도 집이 따뜻하지 않았다. 추위를 엄청 질색하는 나로서는 난감했다. 보일러를 괜히 교체했나 하는 후회도 했지만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맘 놓고 보일러를 돌리면 한 달에 백만 원으로도 부족할 거 같아 추워서 떨리는 것이 아니라 기름값이 무서워서 덜덜 떨렸다.
밤에는 기름보일러를 돌리고 낮에는 비상용으로 거실에 마련해 놓았던 화목난로를 최대한 이용했다. 화목 난로가 공기를 데우는 그래도 나은 거 같았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한 거 같아 온풍기도 샀다.
기름보일러에 화목난로에 온풍기까지... 겨우내 온갖 난방 장치를 다 돌려 댔다.
그래서 비용이 억수로 들었다. 그러고도 아파트처럼 훈훈하게 겨울을 나지 못했다는 거.
첫겨울을 그렇게 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처음으로 산골로 들어온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매년 겨울을 이렇게 나야 한단 거지?
상황이 이렇게 되어 실내에서도 두툼한 옷을 입고 있어야 했고 밤에는 이불을 두 겹 세 겹 덮었다.
당연히 짜증이 밀려왔다.
내가 저질러 놓고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몸에 한기가 들지 않게 따뜻한 차를 자주 마시고 낮에는 화목난로 옆을 떠나지 않았다.
화목 난로의 조그만 유리문으로 바짝 마른 참나무가 빨간 불꽃을 피우며 활활 타는 모습은 너무 낭만적인데 현실은 그걸 즐길만한 여유가 없게 되었다.
비록 그렇게 되긴 했지만 탁탁 튀거나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빨간 빛깔의 장작이 타들어 가는 모습은 너무 매혹적이어서 빠져 들기에 충분했다.
그 와중에도 즐길 건 즐겨야 했기에 난로에 고구마도 구워 먹고 귤도 구워 먹고 큼직한 스텐 주전자에 대추와 생강을 끓여 향기와 함께 마셨다.
추위와 싸우느라 다른 생각할 겨를 없는 어느 날,
"추운데 산골에서 잘 지내고 있니?" 오랜만에 민호가 전화를 했다.
"정말 춥네. 서울도 춥나?" 난 태연한 척 말했지만 사실 조금 울컥했다.
추워서 정말 짜증이 났는데 하소연할 데도 없고 추위를 피해 갈 데도 없고 오롯이 산골의 강추위와 맞서고 있는 상황이 마치 허허벌판 눈 밭에서 얇은 면 파자마만 입고 찬 바람을 맞으며 버티고 있는 거 같았는데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내가 끌어당긴 건지 지가 끈 건지 모르겠지만 전화기를 통해 또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서울도 춥지." 민호의 대답은 항상 심플하다. 군더더기가 별로 없다.
그래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말이 자주 끊긴다.
"여기도 엄청 추워." 그렇게 말하는데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올라왔다. 들키지 않았나 걱정됐다. 들키게 된다면 그러게 왜 그런 곳에 가서 사서 고생을 하는 거냐는 질책을 들을 것이 뻔했다.
"이번 주말에 시간이 나서 가 볼까 하는데 어때? 시간 괜찮아?" 민호가 물었다.
순간 그가 오겠다고 하는데도 반갑지가 않았다.
내가 춥게 지내고 있는 걸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 편으론 그가 보고 싶기도 했다. 잠깐 동안 망설였다.
초라한 모습을 보여 줄 것인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오지 말라고 할 것인가를 잠시 계산했다.
"으응~ 괜찮아. 오고 싶으면 와도 돼. 근데 여긴 추워..." 그를 보는 쪽으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