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한적한 토요일... 허긴 산골은 언제나 한적하다.
새벽같이 길을 나섰는지 아침 10시가 막 넘자 민호가 그 쌔끈한 백색 외제차를 타고 방문했다.
무릎을 살짝 덮는 두툼한 검은색 파카를 입었다.
전날부터 보일러를 풀가동 해서 누가 봐도 따뜻하다고 느낄 정도로 집을 덥혀 놓았다.
"오! 따뜻하다!" 거실로 들어온 민호의 첫마디였다. 다행이었다.
지난주에 내렸던 눈이 아직 녹지 않아 뒷마당과 뒷밭 그리고 집 주변 그늘진 곳엔 하얀 솜털을 올려놓은 듯 군데군데 눈이 남아 있었고 기온이 올라가지 않으니 언 상태로 멈춘 거 같았다.
12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으니 날은 점점 더 추워질 것이고 해가 가기 전에 눈이 한 번 더 온다는 기상예보가 있었다.
정선 산골의 겨울은 그 어느 곳 보다도 길다. 예전엔 5월에도 눈이 내렸다고 하는데 최근에 기상 이변으로 그 정도는 아니어도 언 땅이 완전히 풀리기는 5월 초순쯤이라고 한다.
3월 정도까지만 추위와 싸우고 나면 그 후엔 좀 낫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만 하고...
그때 까지는 어떻게든 요령껏 전기세 기름값을 최대한 아껴가며 훈훈한 겨울을 보내야만 한다.
이장인 현정이 아버지에게 군청 산림과에서 파는 장작을 한 톤 그러니까 한 트럭 더 사다 달라고 부탁하려고 한다. 작긴 해도 거실에 설치한 화목 난로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화목 난로가 없었으면 거실엔 나오지도 못하고 온종일 침대 이불속에서 움츠리고 있었을 것이다.
산골에선 겨울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니 더더욱 그랬다.
아침에 8시쯤 눈을 뜨면 먼저 블루투스 음악을 틀고 이빨을 닦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때 되어 밥 해 먹는 거 외엔 힘 들어가는 일이 없어서 밥 먹고 설거지하고 나면 화목 난로 위에 올려 끓이고 있는 생강 대추차를 컵에 따라서 거실 창가에 있는 둥근 테이블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며 집 주변을 살피거나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거나 지겨워지면 tv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
주방 문을 열면 조금 떨어진 곳에 수돗가가 있고 거기 까지는 바닥을 시멘트로 발랐다. 수돗가 바로 옆에는 나이를 알 수 없는 고목이 하나 있다. 집 지붕 보다도 훨씬 키를 넘긴 그 나무는 개살구 나무 라고 하는데 밑동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서 자랐다. 개살구 나무가 귀하다고 하는데 두 줄기가 부부처럼 사이좋게 마주 보며 쭉 뻗으며 자랐으니 모양도 특이하다. 이 나무에서 가을부터 겨우 내 낙엽이 떨어지기 때문에 종종 바닥을 쓸어 주어야 한다. 겨울엔 그게 큰 일이라면 큰 일인데 운동 삼아 이틀에 한번 쓸어 준다.
"무섭지 않아?" 민호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바로 옆에 이웃집이 있어서 그런 지 무섭지 않아. 그리고 강화도에서도 살아 봐서 그런 지도... 괜찮아."
사실이다. 강화도에서 살아 보지 않았다면 정선으로 올 생각은 엄두를 못 냈을 것이다.
"내년 2월 경부턴 서울에서만 살 거야. 미국은 정리하고." 민호가 말했다.
"아, 그래? 잘된 거야?" 살짝 반가운 소리처럼 들렸다. 그런데 곧 그 말이 왜 내게 반가운 말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호를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었나 보다.
"미국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그동안 한국 파트를 내가 맡고 있었으니까 내가 오기로 했어." 민호가 말했다.
"무슨 사업인데?" 하고 내가 물었다.
"IT 관련 사업이야" 민호가 말했다.
그동안 미국과 한국을 오가느라 힘들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며 잠시 대학에서 교수로 있었고 한국 대학에 교수로 올까 하다가 교수를 그만두고 회사를 창업했다고 한다.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건 아니라고 한다.
미국에서 사업이 너무 바빠서 집 안을 잘 살피지 못하다가 결혼 10년쯤 됐을 때 이혼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혼 후 10여 년이 지난 것이다.
"이혼하고 재혼도 했어?" 내가 물었다.
"아니... 혼자 살았어. 너무 바빠서... 재혼할 생각 안 했어."라고 민호가 말했다.
"지금까지 혼자 살았다고?" 나는 놀라며 물었다. 너무 의아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이제 겨우 혼자 살기 일 년도 안된 내가 생각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뭐야... 나도 이제부터 저렇게 10년 20년을 혼자 살아야 한다는 거야...
몇 살에 죽을지 알 수 없지만 90세 100세 시대라고 온통 떠들어 대는 시대인지라 그렇게 보면 살아갈 날도 살아온 날 못지않게 남았다.
민호와 이런 대화를 할 때 내 머릿속은 온통 '이혼'에 대한 문제 내지는 과제가 떠나질 않았다.
주변에선 왜 이혼을 하지 않느냐고 의아해하고 또 은근 채근한다.
"혹시 기다리는 거야? 다시 합치려고?..." 하는 말이 그중에 내게 가장 모욕적으로 들린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아니야! 아니라고!' 하면서 절규에 가깝게 외친다.
'민호는 깔끔하게 이혼을 했네' 나는 속으로 조금 부러웠다. 얼마나 홀가분할까 생각하니.
이혼을 부러워하면서도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혼을 한다며 그를 다시 만난다면 겨우 아물어 가던 상흔에 다시 생채기가 날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다독거려 진정시켜 놓았는데 그걸 건드려 덧난다면 그 상처는 정말 진짜 오래갈 거 같았다. 아니 영원히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치가 다 떨렸다.
어쨌든 지금은 바람피운 남편 한데 대들었다가 주먹으로 죽도록 쳐 맞고 때리다 때리다 지도 힘들어 잠시 조는 틈에 느슨해진 오랏줄을 풀고 허겁지겁 산발에 맨발로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온 여편네 같은 신세가 된지라.
어떤 이유에서든 남편을 만난다는 건 공포 그 자체였으므로... 남편과 관련된 부분은 실오라기 같은 연일지라도 다시 잇고 싶지 않았고 떠 올리기도 싫었고... 지금 내가 무척 예민한 사람임에도 마치 진정제라도 투약한 거처럼 몽롱한 것이 남편에 대한 기억이 거의 나지 않는데... 예리한 칼 날에 무의 토막이 잘려 나가듯.
어느 날 문득 이런 현상을 의식하고 나서는 하도 기이해서 "사람이 맥없이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다 살기 마련이구나"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었다.
"혹시 우리 오빠한테 나에 대한 얘기 들은 거 있어?" 나는 민호가 알고 있는 듯해서 확인 차 물어보았다.
"조금 들었어. 별거 중이라고... 자세한 말은 안 하던데..."라고 민호가 대답했다.
별거 중이라고만 말했다니 말 많은 오빠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싶었다.
"별거하는 이유가 뭐야? 남편이 바람이라도 핀거야?" 민호는 돌리지 않고 직접 물어봤다. 알고 물어보는 건지 모르고 짚은 건지. 모르고 짚었다면 정확하긴 하다만.
"응, 바람 폈어." 나도 돌리지 않고 침착하고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 알게 될 일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고 감추거나 거짓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심으론 남편의 비 정상적인 행동을 마구 폭로하고 싶었다. 언듯 언듯 치밀어 오를 때마다 힘껏 짓누르지만 어쩌다 누구라도 물어보면 남 일 이야기하듯 태연하게 곧장 대답했다. "네. 바람 폈어요."
더 솔직히 말하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라고 시내 한복판에 있는 중앙 로터리 분수대 위에 올라가 외치고 싶었다.
"남편이 바람을 폈어요. 바람을 피운다고요. 우리 남편은 절대 결코 네버...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민호는 농담 삼아 짚어 본 말이 사실이라는 사실에 흠칫 놀라는 거 같았다.
그리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그리고 한 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폭로는 했지만 결코 속이 시원하거나 기쁘지 않았다.
돌덩이라도 쑤셔 넣은 듯 마음이 무거워졌다. 분위기가 급 냉랭해졌다.
그래도 괜한 말을 했다며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말에 민호가 왜 그렇게 암울한 표정이 되었는지 안타까워서 그랬는지 정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로 나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에서 하얀 안개 빛 같은 안쓰러움이 퍼져 나왔다.
나는 그가 쏘는 빛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 하얀빛이 내 눈동자에 닿기라도 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