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알고 보니 우리 동네는 약간 씨족 사회 같았다.
동네 분들이 한 다리 건너서 다 가깝든 멀든 친척 지간이었고 친척이 아니어도 조상 대대로 한 마을에서 살다 보니 친척 이상으로 가까웠다.
정확한 나이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우리 아랫집에는 60 중반의 부부(김 씨 부부)가 살고 있다. 일곱 명이나 되는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독립시켜 내보내고 두 부부만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새벽부터 시작해 하루 종일 자기 집 주변 밭에서 일을 한다. 사람도 사지 않고 둘이서 사이좋게 잡아주고 당겨주며 만평에 가까운 밭을 열심히 짓는다. 놀라울 정도다.
옆집에 사는 임 씨에게 들어 본 바로는 김 씨 아저씨보다는 아주머니가 더 일을 많이 한다고 한다. 아주머니가 없었으면 김 씨 아저씨는 저렇게 까지 농사를 못 지었을 거라고 한다.
지금은 아주머니가 나이도 많고 아픈 곳이 많아서 밭에 자주 못 나오지만 그전에는 정말 부지런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 보기엔 지금도 아저씨보다는 아프다는 아주머니가 더 자주 보이는 것 같았다.
강화도에서 살 때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지만 여기서도 아주머니가 가끔 농산물이나 음식을 주었다.
특히 직접 만든 손두부... 콩 농사를 짓기 때문에 두부를 자주 만들어 먹는데 몇 번 가져다주었다.
방금 만든 하얀 김이 솔솔 나고 고소한 냄새가 폴폴 나는 큼지막한 두부를 양은그릇에 담아 들고 온다. 너무 반갑고 고맙다.
흙보다 자갈이 더 많은 거 같은 강원도 정선의 거친 땅에서 자라는 모든 작물은 이상하게 다른 지역에 비해 맛있다. 대표적인 작물이 감자와 옥수수인데 강원도 감자와 강원도 옥수수 하면 그냥 믿고 먹는다. 요즘은 고랭지 배추와 시래기가 아주 유명하고 가격도 타 지역에 비해 비싸다.
이장한테 감자와 옥수수를 얻어먹고는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어서 내년에 반드시 감자와 옥수수를 심기로 결심했다.
강원도 작물이 맛있는 비결은 바로 척박한 땅 때문이었다. 믿기지 않았지만 돌 반 흙 반인 땅 때문.( 부피로 치자면 돌이 더 많을 거 같아 보이는)
돌이 흙속에서 공기 층을 만들어 숨을 쉬게 하고 배수도 잘 되게 만들어 뿌리가 튼튼하게 자란다고 한다.
아하! 강원도 감자와 옥수수가 맛있는 비결이 바로 그거였다. 주먹만 한 자갈이 드글거리는 척박한 땅...
또 할미꽃이 있는데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동강 부근은 '동강 할미꽃'의 서식지이다. 동강 할미꽃은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 식물이다. 그런데 이 식물은 바위틈에서 잘 자라는데 그래야만 그 특유의 모습으로 자랄 수 있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동강 할미꽃의 씨를 받아서 평평하고 기름진 꽃밭에 심으면 그 고유의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해마다 동강 할미꽃 축제가 열리면 전국에서 달려온 사진사들이 바위틈에서 자라는 동강 할미꽃을 찍기 위해 다 깎아지른 절벽에 붙어 낑낑 대고 있다. 그 모습이 더 볼만하다고 할까...
내가 정선에 집을 사기로 결정했을 땐, 이런 사실들을 하나도 몰랐다. 동강이 집 근처에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그런데 날이 가며 정선에 대해 알게 되면 될수록 천연자원의 보고에 집을 샀다는 생각을 아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을 회관 겸 노인정은 봄 여름 가을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사람이 없다. 일손이 부족한 탓에 노인이라고 해서 노인정에서 한가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러나 겨울엔 한가한 탓에 종종 노인들이 모여서 식사도 하고 장기도 두고 마을 회의도 한다.
한 번은 마을 회의 했는데 회의를 마치고 부녀회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식사 메뉴 중에 된장찌개가 있었는데 너무 맛이 있었다.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할머니가 담근 시골 된장 딱 그 맛이었다. 우리 아랫집의 김 씨 아주머니네 된장이었다.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본 김 씨 아주머니는 다음 날 플라스틱 통에 1kg 정도의 된장을 가져 다 주었다.
그 된장도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집에서 만든 수제 된장인 셈이다. 나는 또 감동을 넘어 감격했다.
그 보답으로 마트에서 식용유나 세제 등을 사서 주었다.
어느 날,
부엌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로 나 온 나는 거실 창 밖을 보려다가 기겁을 하고 말았다.
송아지 한 마리가 창 밖에서 집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말이 송아지이지 가까이에서 보면 송아지도 꽤 덩치가 크다. 생각을 해 봐도 사람과 가까운 동물 중에 고양이 강아지 개 등등이 있어도 아무리 큰 개라 하더라도 갓 태어난 송아지 보다 큰 개는 없다. 그 정도로 송아지가 큰 놈이다.
그런데 그 송아지가 어른 주먹한 큼 커다란 두 눈을 끔뻑 거리며 창 밖에 서서 얼굴을 들이 밀고 집안을 보고 있었으니 너무 놀라 뒤로 나자빠 질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전화기를 찾아 이장한테 전화를 했다.
이장은 읍내에 나와서 바로 갈 수 없지만 그 송아지는 김 씨 아저씨에 송아지니까 김 씨 아저씨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송아지는 집안을 들여다보다가 사람을 보자 뒷걸음질을 치더니 휙 돌아서 텃밭으로 뛰어갔다. 뒷 발질을 해대며 폴짝폴짝 뛰어가는 폼이 정말 말 그대로 철없는 망아지 같았다.
송아지가 뛰어다닌 텃밭은 그 녀석 발자국으로 푹 푹 패인 자국이 선명했다.
얼마 후에 김 씨 아저씨와 연락을 받고 달려온 우리 옆집 임 씨가 송아지를 잡으려고 나타났다.
김 씨 아저씨가 "워이 위어" 하며 송아지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송아지가 애완견도 아니고 부른다고 고분고분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아니 말을 들을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송아지는 사람을 보자 마구간을 통과해 김 씨 아저씨네 뒷 밭으로 도망을 쳤다. 김 씨 아저씨와 임 씨가 송아지를 잡으려고 같이 뛰어갔다. 송아지와 두 사람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고삐도 없는 말 귀도 못 알아듣는 송아지가 쉽게 잡힐 것 같지 않았다. 저러다 산속으로 도망가 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30분쯤 지났을 때 그들이 나타났다. 웬일인지 송아지가 천천히 마구간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고 두 사람이 뒤에서 송아지를 몰고 있었다.
김 씨 아저씨는 비상금을 마련할 요량으로 송아지 한 마리를 사다 키운다. 송아지가 황소가 되면 업자가 트럭을 가지고 와서 황소를 태우고 간다. 가을에 산 만한 황소 한 마리가 업자의 트럭에 실려 나갔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 송아지 한 마리가 트럭에 실려 내려졌다.
김 씨는 아침 일찍부터 소여 물을 끓여서 정성스럽게 송아지를 보살피는데 늦가을부터 송아지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송아지도 겁이 많아 처음엔 풀어놓아도 헛간 주변이나 김 씨 아저씨 밭 주변에서만 어슬렁 거리더니 밭은 넓지 사람은 없지 그러니까 매일 조금씩 활동 반경을 넓혀 갔다.
그러더니 급기야 우리 집 마당까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제야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송아지는 갈수록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우리 집 마당에 들어와서 집 주변에 설치해 놓은 야간 조명을 밟고 부러뜨리고 깨뜨리고 마당 곳곳은 송아지 발자국이 난무했다.
나는 겁이 나서 마당을 나갈 때 송아지가 있나 없나 살핀 다음에 나갔다. 그러나 살핀다 하더라도 울타리 없는 마당인지라 언제 어디서 송아지가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이장을 불러서 박살이 난 조명등 3개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무서워서 마당에 나갈 수 없다고 호소했다.
이장의 얼굴이 화가 난 표정으로 바뀌더니 언성을 높이며 김 씨 아저씨를 나무랐다.
"삼촌한테 몇 번을 얘기했는데도 고집이 황소고집이라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 벌써 얘기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김 씨 아저씨는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일까? 의아했다.
"황소고집이라니까요. 송아지가 개새끼인 줄 알아요. 산책을 시킨다고 풀어놓는다니까요."
그 후로 며칠간 김 씨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헛간과 창고를 왔다 갔다 하므로 하루에도 서너 번을 보아야 하는데... 나를 피하는 거 같았다.
며칠 뒤에 겨우 김 씨 아저씨가 헛간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망가진 조명등을 가지고 가서 김 씨 아저씨에게 보여 주었다.
김 씨 아저씨는 "아이고 미안합니다. 송아지가 사모님네 마당까지 들어갈 줄 몰랐습니다. 그거 얼마입니까?"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돈 받으려고 보여 드리는 거 아니에요. 송아지를 풀어놓으면 이런 사고가 나니까 풀어놓지 마시라고요. 저도 무섭고요."
"아임니다 사모님 변상할게요. 얼마입니까?" 김 씨 아저씨는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나는 얼마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고 돈을 받지 않았다.
마침내 김 씨 아저씨의 황소고집은 그렇게 해서 꺾였다.
옆집 임 씨 말도 안 듣고 조카 이장 말도 안 듣던 김 씨 아저씨는 내가 망가진 조명등을 보여 주자 그 후로 송아지를 풀어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