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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노화 Dec 19. 2024

아버지가 그를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눈이 왔다.

잠들었던 새벽 언젠가부터 내리던 눈은 아침 7시경 눈을 떴을 때도 내리고 있었는데 마치 하얗고 미세한 떡가루를 위에서 뿌리는 거처럼 사부작사부작 내려앉고 있었다.

하늘이 온통 잿빛인 걸 보니 더 내릴 모양이다. 시야가 30m 정도에서 뭉그러지 듯 아득해졌다.

벌써 10cm 이상 쌓인 거 같은데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은 여름인데도 겨울 걱정을 했었다.

"겨울에 눈 오면 고립되겠다" 라면서.

막상 살 사람인 나는 그 걱정을 한 적이 없는데 그들 말을 듣고 나서야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들처럼 걱정이 되지 않았다.

추운 겨울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눈 만 내리면 첫사랑 만나는 거처럼 설렌다.

오히려 눈이 많이 와서 고립되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 홋카이는 12월 경부터 3월경 까지 끊임없이 눈이 내리며 쌓이는데 영상을 보면 주택 처마 밑까지 눈이 쌓였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게 뚫은 길 양 쪽이 2m나 되는 눈 벽이었다.

그 영상을 보면서 무척 부러웠었다. 저 정도는 내려야 고립 운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정도 눈이 내리면 고립은 둘째치고 지붕이 먼저 주저앉을 것이다.

오늘 눈은 예상 적설량이 20~30cm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한국에서는 폭설이다.

어두 컴컴한 밤이 되면 도시에서는 분명 차들이 벌벌 기고 앞 뒤로 뒤죽박죽 엉킬 것이다.

산골은 그나마 드물던 인적이 완전히 끊기고 더욱 고요하고 적막해졌다. 그래서 소복소복인 거 같기도 하고 사각사각 거리는 거 같기도 한 눈 내리는 소리마저 들린다. 거기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바람까지 불어와 눈을 사방으로 흩뜨려 뜨렸다가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곧게 내리던 눈이 찬 바람을 맞자 입자가 더 단단해지며 더 하얗고 선명해진다. 푸른빛을 내는 바람에 하얀 눈이 춤을 추는 거 같다. 신비로운 풍경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인위적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깊은 산골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문득, 오늘따라 눈 내리는 광경이 더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단지 그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빛깔의 생소한 에너지가 집 주변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방에서는 민호가 자고 있다.

아직 기척이 없다. 그에겐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어젯밤 그는 주절주절 아무 말이나 마구 늘어놓는 내 얘기를 끈기 있게 들어주었다. 나는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것이 싫어서 생각을 쥐어 짜내며 마구 지껄였었다.

지금 생각나는 게 별로 없을 정도로 대책 없이...

민호는 떠나기도 그렇고 안 떠나기도 그런 애매한 시간 그러니까 7시쯤 되었을 때에 자고 가도 되냐고 물었다. 일부러 시간을 거까지 끌었던 걸까

아니 일부러 그랬을 리 없다. 그는 사업을 하는 바쁜 사람이다.

내일은 일요일이고 오랜만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마치 예상을 했던 거처럼 아니... 그러 길 바랐던 거처럼...

"응 자고 가도 돼. 근데 작은 방엔 침대가 없어서 매트를 깔고 자야 하는데 불편할 거 같아." 내가 말했다.

"괜찮아." 그가 짧게 말했는데 불편해도 괜찮다는 건지 침대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민호는 거실 소파에 앉고 나는 그 아래 소파에 기대고 앉아  tv를 보았다.

tv를 보며 가끔 한 마디씩 주고받다가 웃긴 장면 나오면 같이 웃다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나는 10시쯤 되었을 때 살그머니 일어나 작은방에 매트를 깔고 잠자리를 봤다.

돌아와서 다시 제 자리에 앉았는데 조금 후에 민호가 자신의 양손을 내 어깨에 살며시 얹었다.

나는 움찔 놀랐다.

무슨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다.

그는 말없이 내 어깨를 어루만지듯 주물렀다.

나는 목을 움츠렸고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경아~ 힘들지?" 그가 어깨를 주무르며 조용히 물었다.

힘? 힘들지... 힘들지만... 지금은 그 어떤 노력도 다 부질없기에... 자포자기한 상태다.

바람도 희망도... 불러일으킬 에너지가 하나도 없다.

활 활 불타 버리고 형태만 남은 재 같다.

살짝 건들기만 해도 곧바로 형체가 으스러지고 미세한 바람에도 뿌연 연기처럼 잿빛으로 흩어져 버릴 거 같다.

대체... 사람한테 이런 정도의 잔인한 상처를 주면서 까지 챙겨야 할 소중한 자기 인생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확보한 자기 인생은 과연 행복할 까 하는 생각...

분명 '행복'이라고 정신승리를 하고 있겠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명분 없는 정신승리를... 막장 인생을 합리화하기 위한 방어기제를...

"힘들지?"라는 그의 말 한마디가 묵직한 돌멩이가 되어 던져지자 끔찍한 기억들이 연못에 묵묵히 가라앉아 있던 진흙이 힘을 받은 듯 봄 들판 아지랑이처럼 분을 일으키며 마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다 내 아픈 기억이 녹아 있고

나는 그것들을 컨트롤할 정도의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그때 문득 민호도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 마주 하고 있는 시간조차도 힘들다.

사람 뒤에서 나를 째려보고 있는 남편의 험악한 얼굴이 어른거리고 사람의 말 끝에도 남편이 던지던 폭언들이 벌떼 날개 소리처럼 웅웅 거렸다.

나는 내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민호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벗어나지 못한 과거로 부터 너무 불편하고 어떤 의미로든 점점 숨이 막혀 왔기 때문이다.

"안 힘들다 그러면 안 믿을 거잖아. 솔직히 힘들어." 나는 꾸며 말하기 싫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고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야." 민호가 말했다.

'정말? 시간만 지나면?' 나는 속으로 반문했다. 위로해 준답시고 의미도 없고 자신도 믿지 않는 하얀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불 깔아 놨어. 피곤할 텐데 그만 들어가서 자." 어린애도 아니고 시답지 않은 말에 대답하기 싫어서 말을 돌렸다.

"그래. 그만 자자. 너도 피곤하겠다" 민호가 눈치를 챘는지 엉거주춤 일어나며 말했다.

그가 작은 방으로 들어 가 문을 닫는 걸 보고 나도 tv를 끄고 안방으로 들어 가 문을 닫았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가 내 집에서 잔다는 사실이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어떻게 내 집에 있게 된 거지?

연결된 끈이라곤 기억에도 없는 어릴 적 발가벗고 찍은 사진 한 장뿐인데...

그렇게도 인연이 십수 년을 건너뛰어 이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된 거지?

기억을 더듬다가 갑자기 아버지 장례식에서 그를 처음 봤다는 생각이 났다.

아버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깊은 시름에 빠졌던 아버지가...

"나는 다만 네가 제일 마음이 쓰인다" 라며 힘없이 말꼬리를 내리며 한숨마저도 눈치채지 못하게 삼켜 버리던 아버지.

아버지가?

아버지가 민호와 나를 이어주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기운에 떠밀려 양팔로 힘껏 방문을 확 열어젖혔는데 저 멀리 끄트머리에서 하늘과 맞닿은 산 봉우리만 아득히 보이고 탁 트인 시야가 눈앞에 펼쳐졌다. 발 밑은 낭떠러지다. 더 이상 디딜 땅이 없다.

세상의 끝에 서서야 비로소 세상이 넓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버지가 민호를 불러 주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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