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흐릿한 기억, 선명한 추억
병원의 일상은 무거웠다. 아픈 이들이 모여있는 만큼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요양병원은 일반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가 어려워 입원하신 분들이 많으니 더 한 것 같았다. 보호자들의 왕래도 적었다. 어쩌다 원무과 앞에 지나치다 보면 병원비 납부 얘기를 듣곤 했다. 매달 병원비 고지서를 받아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치료비라기보다는 생명 유지 비용 같네. 가족들 얼굴도 못 보고 누워 계신 분들은 월세 내는 느낌이겠어.’ 뭔가 아픈 곳을 치료하고, 시술이나 수술을 하고 몸이 좋아져 가면 당연히 치료비라 생각됐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가 호전이 아닌 유지를 하고 계신 현실을 보며 안쓰러움이 감돌았다. 보호자들도 매달 들어가는 비싼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못 들리는 경우도 많을 듯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가정도 많겠지만.
어른들과의 주파수를 알고 나서는 병원 체재시간이 길어졌다. 노래는 의무적으로 틀었다. 자잘한 어른들의 심부름이 많아졌다. 기저귀 갈아달라, 가래 빼줘라, 베개 좀 다시 맞춰줘라 등 남 눈치 안 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심부름들이었다. 그 와중에 내가 제일 궁금한 엄마와의 소통은 아직이었다. 알 수가 없었다. 어른들도 엄마하고는 얘기를 못했단다. 아마도 내가 자주 와서인지 불러내려 해도 어렵다고 했다. 꿈에서도 잠시 들었지만 어른들도 정확히 아는 바가 아니니 더 물어볼 것이 아니었다. 기다릴 뿐이다. 내가 자주 와서 어렵다고 해도 안 올 수는 없었다.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엄마의 마음이었다. 오랜 세월 홀로 지내오며 어떠했는지. 자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으신지. 누워계시지만 하고픈 것, 원하는 것이 있으신지 등 많은 것이 궁금했다. 하지만 들을 수가 없으니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대신 나는 다른 어른들의 사연도 알아볼까 기회가 되는대로 여쭙기 시작했다.
초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11월 말의 저녁. 회사일을 조금 일찍 마치고 병원으로 향했다. 수능시험을 앞두고 편의점마다 선물용 초콜릿 세일이 한창이다. 간호사들과 간병인들을 위해 한 봉지 손에 들었다. 수험생들 덕에 싸게 샀다고 나름 뿌듯해한다. 달달한 초콜릿을 전달하고 엄마 곁에 앉아 눈곱을 비롯한 기본 정리를 마쳤다. 패티김 노래를 틀었다. 잠을 많이 주무시는 또자 할머니는 부르기 가장 좋은 상대였다. 노래를 틀고 엄마와 눈빛을 나누고 또자 할머니를 불렀다. 어느새 가까워진 할머니는 나의 요청에 바로 대답하셨다.
“아들은 괜찮나? 우리랑 자꾸 대화하다 보면 정신이 오락가락할 텐데”
“괜찮아요. 저는 재밌는데요. 좀 어떠세요?”
“간병인이 남자가 와서 좀 불편해. 요즘”
“저 새로 온 사람이여?”
“응. 모르는 남자가 내 몸을 챙겨주니까. 여기 옆에 여자들도 그럴 거야. 늙어도 여자니까. 수치스러운 게 있지”
“그렇겠네요. 어른들이라 엄마처럼 느껴져서 그런 생각은 못했어요. 하긴 예전에 저희 엄마도 제가 하면 불편해하셨던 것 같아요. 아들이라도 남자니까. 그나저나 어떻게 해요. 간병인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고.”
“뭘 어째. 어쩔 수 없지. 그냥 참아야지. 여자든 남자든 내 몸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 건 정말 괴로운 거야”
“저는 겪어보진 못했지만 그렇겠어요. 저라도 누군가 저 대신에 제 몸을 씻겨주고 속옷을 갈아입혀준다면. 생각만 해도 불편하네요”
“됐어. 어쩔 수 없지. 내가 아픈 게 누구 탓이겠어. 내 책임이지”
“그나저나 할머니는 언제부터 아프셨던 거예요?”
“자네도 삼형제지?”
“네 맞아요. 다 아시네요?”
“그럼, 알지. 누워있어도 우린 다 알아. 나도 셋을 뒀지. 아들 둘에 딸 하나. 신랑은 먼저 보냈어. 벌써 10년 됐나. 새끼들 잘 키워놓고 손주도 보고. 그이가 암으로 먼저 갔지. 일찍 갔어. 참 잘해줬는데”
“암이 참 무서워요. 근데 자제분들을 한 번도 못 뵌 것 같아요”
“바쁘니까. 그리고 치매는 무서운 거야. 내 새끼들도 참 착하고 나한테나 신랑한테 잘했지. 그러다 애아빠가 암 투병하면서 재산을 많이 해 먹었지 뭐야. 성실히 직장 생활해서 우리 부부 살집 하나 마련했는데 병 땜시 다 날렸지”
“암 치료가 돈이 많이 들죠”
“그나마 있던 집 팔아 병치레하고 돈 다 쓸 때쯤 갔어. 꼭 자기 아플 거 알고 사놓은 것처럼”
“신기하네요. 할머니가 많이 힘드셨겠어요. 병간호에 자식들 챙기시느라”
“돈 있고 집 있을 땐 몰랐지. 그것보다 사이좋던 우리 부부라 애아빠 가고 아들 집에 얹혀 사는데 우울증이 오더라고”
“우울증이요?”
“아무리 자식이라도 부부 사이가 중요한 거야. 내가 의지를 많이 했었지. 그래서 그런가 상실감이 커지더니 입맛도 없고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많아졌어. 그리고 우울증이 왔어”
“제 주변에서도 배우자를 먼저 보내고 우울증에 걸렸다는 어른들 얘기를 간혹 들었던 것 같아요”
“나만 그런 게 아니야. 사람이 맘 편히 대화할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힘든 게 없거든.”
“정말 믿을 수 있고 어떤 얘기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죠”
“우리 신랑이 그런 존재였으니까. 아들 며느리 손주가 있어도 허전함이 커졌어. 우울증은 무서워. 몸도 마음도 녹아내리는 것 같아. 겉으론 멀쩡한데 순식간에 녹아들어.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러더니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했지”
“무섭네요. 기억이 없어진다는 건...”
할머니의 덤덤한 목소리가 슬픔을 머금고 촉촉하다.
“무섭지. 그래도 겪어야 하면 겪어야지. 전부 내가 선택한 것들인데... 더 설명하면 말이지, 그렇게 녹아내린 기억들이 몸 밖으로 흘러나가 내 안에서 없어지는 거야.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오히려 고통은 없어. 기억을 못 하니 슬퍼할 일이 없지. “
“그 고통스러운 병을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걸까. 어느 누가 모든 것을 잊는 병을 스스로 원해서 겪을까?
“그럼. 아직 어려서 모를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내가 원한 거란다. 아프고 나서야 알게 됐지. 소중한 것들을 내려놓고 벗어던지면서 많은 진실들을 알게 되나 봐. 자식들에 대한 것도. 내 자신의 문제도 말이야”
“좀 어려운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내려놓고 알게 되는 것은 저도 조금은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당장에 엄마가 누우시고 나서 느낀 것들도 많으니까”
“뭐 아무튼 드라마에서나 봤지 내 일이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니. 우울증 이후에는 기다린 것처럼 무너져 내렸어.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혼자 못 가고. 6개월 정도 지나니까 새끼들도 감당이 안되니 병원으로 오게 되었지”
“6개월이요? 그렇게 빨리요?”
“치매는 순식간이었어. 알고 나서는 약을 먹고 치료를 받아도 걷잡을 수 없었지. 초기에는 정신 오락가락했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것도 못하는 거야. 내 생각에는 마음병인 것 같아. 신기한 거 알려줄까?”
“신기한 거야? 그게 뭔데요”
“기억과 추억의 차이가 뭐 같아?”
“기억과 추억의 차이라. 기억 속에 추억이 포함된 거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이 병을 겪어보니까 조금 틀리더라고. 기억은 머리와 몸에 쌓여가는 거고, 추억은 마음에 새겨진다고 해야 할까! 나는 그랬어.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먼저 간 신랑에 대한 추억은 남아있는 거야. 우리 둘째 놈이 지 애비랑 똑같거든. 그래서 지금도 둘째 놈만 보면 눈이 선명해져.”
“그것 참 신기하네요. 기본적인 생리현상도 잊어버리는데 그런 추억만 생각난다는 게. “
“이렇게 멍하니 누워있는 내 몸뚱이를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해봤거든. 사람은 행복했던 추억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 집을 사고 안정되기 시작했을 때도 좋았지만 신랑이 아프기 시작했지. 그래서 그런지 새집에 대한 것은 아픈 신랑 기억에 마음이 아프고 생각하기 싫은 거야. 근데 정말 어려웠지만 알콩달콩 다섯 식구가 좁아터진 집에서 살던 기억은 생생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죠. 좋은 것만 기억하고 싶을 테니”
“내 기억은 20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먹고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스스로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그러니 지금이라도 엄마랑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봐. 말은 못 해도 누워있는 우리는 다 느끼니까.”
“그래야겠네요. 그나저나 어떻게 해 드려야 행복하실까요? 할머니 생각엔 어때요?”
“그걸 내가 어찌 아누. 사람마다 다 틀린 거지.”
“진작에 자주 찾아뵙고 시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스러워요. 그래도 누워서라도 느끼신다는 말씀에 힘이 나네요”
“지금이라도 마음....”
갑자기 할머니의 말이 끊겼다. 간병인의 체위 변경으로 눈을 뜨신 거다. 대화에 집중하느라 간병인들이 오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턱을 고이고 한참을 엄마 손을 보며 웅얼거리 듯 대화한 나는 팔이 저렸다. 엄마는 언제나처럼 나의 대화를 들으시는 듯하다 잠드셨다. 시계를 보니 8시가 넘었다. 가만히 기억과 추억으로 시간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기억과 추억에 대한 생각이 깊어져 갔다. 또자 할머니 덕분이다. 무심코 지내왔던 생활 속에서 나에게 남아있는 소중한 추억들이 얼마나 될지 생각이 많아졌다. 한 번뿐인 삶인데 무엇을 위해 정신없이 움직여 왔는지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온갖 걱정들을 껴안고 회사든 집안에서든 노력해 온 것 같은데 선명한 기억은 아니다. ‘행복했던 추억이 뭐였지’라고 아무리 물어봐도 먹구름 넘어 어딘가 있을 태양을 찾는 기분이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거센 바람으로 구름 떼를 날려버리고 싶다.
“또자 할머니! 저 왔어요. 인나보셔요”
분명히 주무시는데 답이 없다. 계속 불렀다. 들을 수만 있기 때문에 대답을 기다리며 부를 수밖에 없다.
얼마 안 있어 귀찮은 듯 대답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왜 그리 부르나. 이 놈이 이제 시도 때도 없이 부르네”
“할머니도 기다리신 거 아니에요?”
“기다리긴 내가 널 왜 기다려! 그냥 올 때가 됐나 생각만 했지..”
“거 봐요. 기다리신 거네... 그나저나 할머니 추억 얘기 좀 더 해주세요”
“뭔 추억 얘기. 지난번에 하던 거?”
“네. 그 얘기요.”
“그게 그렇게 재밌냐?”
“재미도 있지만 큰 공부죠”
“맘이 좋으네. 내가 가방끈이 짧아서 잘은 모르지만 말이야. 내 경험에서 보면 추억은 함께 나누는 것 같아.”
“나눈다고요?”
“그래. 나누는 거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니까. 그리고 감정이 있잖아. 특히나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기억은 추억으로 깊숙이 새겨지는 것 같아. 내가 화장실 가는 것조차 잊게 되었을 때도 둘째 아들 보며 신랑 얘기를 했던 것 보면. “
“지난번에도 말씀하시더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엄청 잘해주셨나 봐요?”
“우리 신랑은 맘이 이뻤지. 세심하고 가정적이고 참 잘해줬어. 중매로 만났지만 기다린 듯한 사랑이었어”
“중매로 만나셨어요?”
“우리 때야 중매가 많았지. 그리고 나는 결혼을 빨리하고 싶었거든. 사람이 참 선해보여 좋았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지. 젊어서는 표현이 서툴렀지만, 시간이 갈수록 표현도 많이 해주고 아이들에게도 잘하고”
“자상하셨네요”
“그 시대에 남편들 중에는 보기 드물었지. 아이들 키우며 함께했던 추억이 많아. 그래서 그런지 그때 기억이 많이 나.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애들 데리고 시장을 거닐던 일. 봄이면 길가에 핀 개나리 꺾어 신문지로 둘둘 말아 선물도 해주고. 막내 업고 주방에서 열심히 밥도 해주고. 뭐 말하려면 끝이 없지. 추억이라도 큰 게 아닌 것 같아”
“부럽기도 하네요. 저는 아빠 없이 커서 그런지. 근데 저도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추억은 소소한 일상들이 많은 것 같아요”
“그럴 거야. 남자들은 뭐 큰 거라도 해줘야 추억이 생길 것처럼 많이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게 엄마 포장마차 구들장에서 자고 새벽에 같이 귀가하던 게 떠오르는데요”
“엄마와 함께 나눴던 시간이 어린 마음에도 좋았나 보네. 억지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 소소한 생활에서의 추억들이 많이 쌓여있어. 죽을 때 기다리며 침대 누워있다 보니 불안함보다는 차분해지는데 말이야. 하얀 천정을 테레비 화면 마냥 추억들 돌려보는 맛이 있지. 옆에 노인네들도 다 비슷해. 나름의 추억을 돌려보는 거지.”
잠시 나는 생각하다 여쭸다.
“그럼 엄마로서는 어떤 추억이 떠오르세요?”
“너무 많지. 배아파 낳은 순간부터 결혼해 손주들 안고 올 때까지 모든 게 추억이지. 뱃속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 삶의 전부였으니까. 자식은 그런 존재야. 아무리 잘해줘도 아쉽고 부모로서 못해준 것은 추억만큼이나 가슴에 새겨져 평생 미안하고.”
“근데 할아버지 생각이 더 많이 나시나 봐요?”
“사람마다 틀리겠지. 내 경우에는 신랑이 사무쳐. 추억이라는 게 소중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내게는 자식들이 있기 전에 신랑이 있었고 그 사람과 모든 것을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먼저 보내고 나니 더 크게 자리 잡았겠지”
“제가 어리바리한 질문을 했나 봐요!”
“아니야. 정답이 없으니까. 내가 그런 거지. 누구나 살아온 모습들이 틀리니 나름대로 더 크게 남아있는 추억들이 있겠지. 이쁜이는 네 말데로 혼자 자식들 키웠으면 자식들에 대한 추억이 클 거야.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은데”
“병상에서는 어떠세요?”
“참 궁금한 것도 많다. 병상에서 좋은 거는 하나 있지. 자식 놈들이 솔직해진다는 거. 아무 일 없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알 수가 있더라고. 아무리 내 새끼라도 사람인데 전부 알 수는 없으니까”
“아무래도 자식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죠. 저도 그런데요”
“속상한 것도 많아.”
“어떤 거요?”
“사람은 벼랑 끝에서 솔직해지는 경우가 많거든. 내 새끼들도 그랬지. 지들 아버지 가실 때는 남은 재산 때문에 그러고. 내가 똥오줌 못 가리게 되니까 옆에 두는 것도 문제고. 자식들이 결정할 것들이 생길수록 보이는 게 많아지지”
“결정이 맘에 안 드셨나 봐요?”
“아니야. 맘에 들고 안 들고 가 있나. 나야 당연히 새끼들 편한 게 좋지. 그 과정에 혹여나 내가 들을까 조심조심 상의하지만 얼굴만 봐도 다 느껴지거든. 그게 속상한 거지. 걱정스럽고. 마음 쓰는 데로 살아가게 된다는 걸 살아오며 나도 배웠으니까. 우리 새끼들도 나이 들어 알게 될 부분이지만, 그래도 사람이니 속상하긴 해”
“어려워요. 정말”
“머리 아픈 얘기 그만하고. 아무튼 속상함 때문인지 신랑과 추억이 더 많이 생각나는 것 같아. 엄마한테 지금처럼 자주 찾아와서 수다 떨어. 다 듣고 있어. 나는 알 수 있지. 그리고 그게 다 추억이 된단다”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죽을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뭔 넘의 추억이야!”
바람 할배였다.
“웬일이래. 바람이 네가 말을 다 섞고. 니도 이쁜이 아들이 맘에 들었나 보다”
“맘에 들기는... 하도 시끄러워 그러지. 우리 마누라도 자주 온 다 했더니 더 심한 넘이 나타났지 뭐야”
“시끄럽기는 뭐가 그리 시끄럽다고.”
“내 귓구멍에 얘기하는데 안 시끄럽나. 내용도 궁상 맞고”
“심보 하고는. 끼어들고 싶어 근질근질했구먼. 아들이 이해해. 이 할배가 원래 좀 그러니. 자빠져서도 승질이 쎄”
“내가 좀 쌔긴 하지”
두 어른이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티격태격 대화를 나누셨다.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보니 얼굴이 나를 향해 있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시끄러우셨나 봐요. 지금 보니 할아버지 얼굴이 저를 향해 있네요”
“신경 쓰지 마. 시끄럽기는 잠만 잘 자고 있구먼. 그러니 끼어들었지”
“끼어들긴 뭘 끼어들어. 들리니까 듣다 듣다 말한 거지”
“왜 할배도 추억담 좀 예기해봐.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는 들어보질 못했네.”
“이제 와서 추억이랄 게 있을까? 오늘내일하는 사람들이”
“말하려니 바람피운 추억밖에 없나 보네”
“이놈의 할망구가 정말 승질 돋우네. 누가 그래?”
“승질은 무슨. 할배 마누라가 그러지. 맨날 같이 들음서 뭘 그리 역을 내”
바람할배는 할머니의 말에 조용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갑자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 시간까지 왠일이야. 아드님”
바로 바람할배 아주머니였다.
“아,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늦으셨네요”
“물휴지 떨어졌다고 듣고서는 까먹었지 뭐야. 늙어 고장 나니 자꾸 까먹어. 몇 시에 왔는데 여적 있어?”
“네... 그렇게 됐어요. 이제 가려던 참이에요. 어여 뵙고 가세요”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할배와는 얘기한 적이 없어 아쉽웠다. 그리고 싸우는 두 어른들이 재밌기도 했다.
엄마가 눕고 나서부터 나는 시간을 거슬러 계속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또자 할머니의 경험담은 크게 와 닿았다. 나야말로 뭔가 커다란 일로 행복하게 해드리고자 했던 것 같다. 같이 밥을 먹고, 멍하니 산책을 하고, TV 보며 함께 웃는 소소한 일상이 쌓여 삶의 힘이 되는 행복한 추억이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누워 있어도 다 안다는 할머니의 말씀은 큰 격려가 되었다.
순간의 집착들을 내려놓고, 소소한 일상 속에 마음을 다한 행복한 추억들을 쌓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