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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일 Jun 05. 2020

14. 인터뷰 - 바람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바람 잘 날 없는 ‘바람’

엄마와 친구분들 머리 뒤 병실 창문에 동글동글 투명한 뽁뽁이 단열재가 부착되었다. 그 뒤로 창문이 뿌옇다. 난방이 시작되는 계절이 되었다. 침대 위에 환자 정보에는 ‘입원 - 8월 23일’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병상의 시간은 일상보다 빠르게 느껴졌다. 계절이 바뀌며 병원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죽음을 맞이하는 어른들이 많아진다. 환절기 공포다. 다행히 엄마와 친구분들은 모두 병원에서의 일상 그대로였다.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많이 느낀다. 어른들과의 대화는 더욱 자유로워졌다. 굳이 주파수를 맞추지 않아도 어른들이 눈 감고 있을 땐 자유롭게 부르고 답할 수 있었다. 대화의 시간을 되도록 많이 갖기 위해 노력했다. 방문 시간이 길어질 때를 대비해 다양한 간식들로 간호사와 간병인의 이해를 구했다. 어른들과의 대화가 많아지며 삶이 풍성해졌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 듯하다. 그리고 엄마와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간절함도 커져만 갔다.

바람 할배 아주머니가 먼저 도착해 있다. 엄마를 등지고 앉아 할배와 이어폰을 나눠 끼었다.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리며 노래를 함께 듣고 계셨다. 노래는 들리지 않아도 가수 남진의 노래일 거다. 어른들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오실 때마다 할배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려드린다. 할배는 멍한 눈으로 아주머니와 천정을 바라보며 입을 씰룩거리고 있다. 할배가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변하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딱한 듯 머리를 한 번 손으로 쓰다듬고는 능숙하게 비닐장갑을 끼셨다. 그리고 침대 옆 가래 제거 기계를 켜셨다. 혹시라도 자극이 될까 조심히 목에 달린 호흡기 호스를 빼고는 튜브를 넣어 조심스레 가래를 제거하셨다. 시원해지셨는지 할배는 거친 숨을 몇 번 몰아쉬고는 금세 혈색이 돌아왔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대더니 나까지 고생시키네. 영감탱이!”
비닐장갑을 벗고 투덜대 듯 말하며 할배 얼굴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다시 앉으려다 아주머니는 나를 발견했다.
“아들 왔네! 저녁은 드셨나?”
상냥하게 말을 건네신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따 먹어야죠. 정말 잘하시네요. 그거요. 가래 빼는 거”
나는 겁나서 못하는 일이라 감탄 섞인 목소리로 여쭸다.
“원채 오래됐으니 할 수 있게 됐지. 원래는 간호사들이 다 해야 하지만 이 정도만 내가 하지. 괜히 잘못하면 안 되니까 나도 허락받고 하게 됐어”
“그래도 전 무서워서 못하겠더라고요.”
“여기 목에 구멍 뚫은 노인네들 다 가래 때문에 일이지. 근데 번번이 부르기 답답하니까 나도 하게 된 거야. 나도 성격이 급해서... 그나저나 아들은 이렇게 매일 와도 일에 지장이 없는겨?”
“다행히 회사에서 배려를 많이 해주고 있어서요.”
“고마운 일이네. 그것도 복이여.”
“뭣 좀 여쭤봐도 돼요?”
“그럼. 뭐가 궁금하신가?”
“할아버지가 그렇게 바람을 많이 피우셨어요?”
“아이고야. 말도 마라. 이 놈에 영감탱이 바람 잘 날 없었지. 아주 선수여. 선수”
“근데 괜찮으세요?”
“안 괜찮으면 어쩔겨. 내 복이지. 이 양반이 건설일을 했었거든. 돈은 잘 벌었지. 아들도 알겠지만 건설일이라는 게 현장 돌아다니는 일이 많지. 그것도 몇 개월씩. 옛날에야 핸드폰이 있나 뭐가 있어. 나가면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근데 지방에 가면 그렇게 여자들이 달라붙었나 봐. 아주 그냥 전국 팔도에 마누라들이 깔렸어.”
“와, 대단하신데요. 근데 아주머니는 그 걸 다 알고도 괜찮으세요?”
“괜찮겠냐?! 자식들 때문에라도 참고 살아야지. 그나마 다행인 건 마누라랑 자식들 굶기지 않고 집에서는 잘했으니까. 이 양반 눕고 나서는 다 잊었지. 희한하게 배다른 자식은 안 만들었더라고. 능력도 좋아 이 양반”
한 번 열린 아주머니의 입이 거침없다.
“그렇게 남진을 좋아하더니 전국에 둥지를 틀어놨어. 그 여자들이 불쌍하지. 이것 봐. 늙어서 힘없고 아프니까 마누라밖에 없잖아. 여기저기 상처만 준거지”
“네...”
“아들은 바람피우지 마. 본인한테도 가족한테도 가장 큰 상처야.”
“그럼요. 저는 안 하죠”
“장담하는 게 아녀. 고추 달린 놈들은 아무도 못 믿는 거야. 이 양반이라고 그럴라고 그랬겠나. 순간순간 조심해야 하는 거야.”
“네... 명심할게요”
“남자들은 좀 어린애 같은 면이 있어요. 마누라들이야 애 키우고 살림한다고 아무래도 틈이 없지. 혼자 돌아다니는 남편들은 기회가 많은 거야. 아들도 그럴걸. 그러면 순간 착각하는 거야. 본능이 더 살아나는 거지. 밖에서 일 하다 보면 술자리도 많고. 그러다 만나는 게 사랑이겠남. 물론 그럴 경우도 있겠지만 그저 쾌락으로 이뤄지는게 많아요. 근데 그렇게 만난 여자들 중에는 순애보로 대하는 경우도 많거든. 그럼 작살나는 거야. 전부. 그니까 아들은 둥지 한 곳에 틀어놓고 잘 지키셔. 시간은 빠르네. 나라고 이렇게 쭈글 해져서 영감 병수발할지 알았겠나.”
많은 감정이 묻어 나온다. 여자로서 부인으로서 엄마로서 느꼈을 다양한 상처들이 무심한 표정 속에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는 어쩌다 누우 신건 가여?”
“혈압 때문에. 워낙 집안이 혈압이 높은데 술, 담배에 못 말렸지. 그렇게 사람 좋아하고. 저 코 봐봐. 누운 지가 10년인데도 딸기코는 그대 로자나.”
문득 바라본 할아버지의 코끝이 빨갛다.
“벌써 10년 되셨어요? 여기 오신지 8년인가 되셨다고 들은 것 같은데”
“주무시다 터져서 손을 못 썼어. 자고 일어나니 입에 거품 물고.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해. 1년 넘게 별짓 다 해봤는데 말이 없어. 웬수 같지. 이 병원 열고 얼마 안돼서 들어왔지. 다행히 애들 일찍 결혼들 시키고 손주 보고 누웠어. 희한하지. 그날따라 따로 잤거든. 누울 때가 되면 그리되나 봐. 내가 원망스럽지. 그냥 평상시처럼 같이 잤으면 잠귀 밝은 내가 바로 어떻게 했을 텐데.”
“그런 생각 마세요. 저희도 그랬지만 누구의 책임도 아니니까요”
“알지. 알아도 멍하니 영감 보고 있다 보면 불현듯 생각나. 눕고 죽을 날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돈이든 바람이든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 그래도 바람 핀 기억에는 열불이 올라오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이런 웬수가 없어”
“옆에서 보면 아주머니가 엄청 아끼시는 것 같은데요”
“미우나 고우나 내 남편인데. 전부 내꺼지. 바람도 아픈 것도 전부 내 꺼야. 어떤 때는 바람핀다고 내가 하도 지랄 맞게 해서 누운 것 같기도 해. 귀찮은 듯 영감은 침대에 누워있고, 지랄 지랄한 나는 신랑 욕했으니 병 수발하면서 속죄하라고 말이야”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긴 했죠. 아픈 엄마 홀로 둬서 이렇게 속죄하는 시간을 갖나 싶을 때가 있어요”
“다 비슷해. 아프질 말아야 해. 한 번 사는 인생 담아둘 게 없어요. 아무튼 아들도 바람은 피지말어”
많이도 맺히신 듯 거듭 내게 당부하셨다.

어려서부터 엄마와 함께 만나는 많은 어른들이 내게 말씀하시곤 했다. 바람에 대해서는. 이미 집을 나간 아빠의 영향이 컸다. 고생하는 엄마를 옆에서 지켜본 어른들은 노파심에 어린 나에게도 잔소리처럼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런지 그저 평범하게 부부가 함께 노년을 맞이하는 모습만 봐도 행복해 보인다. 순수한 얼굴로 평온히 누워있는 엄마의 표정을 살핀다. 나는 내 부모님들이 어떤 사연으로 각자의 삶을 걷게 되셨는지 모른다. 두 분만이 알 수 있겠지. 부부 문제란 자식조차도 알 수 없는 듯하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이 병상에서 내게 인생에 대한 수업을 해주시는 것 같았다. 엄마의 병상일기는 나의 인생 수업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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