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능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선일 Jun 08. 2020

15. 인터뷰 - 변명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어려서부터 매일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일기를 써오곤 했다. 일이 바빠지며 일기 대신 다이어리에 그때그때 적어오던 나는 기록을 시작했다. 병상 수업의 내용을 적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른들과의 대화들이 대부분 채워져 갔다. 일상에서 생각할 일이 없던 일들이었다. 드라마에서나 본 듯한 일들을 병상의 어른들을 통해 생생하게 듣고 있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어른들의 이야기는 묘하게 비슷한 부분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엄마가 겪었을 일들을 견줘보며 ‘이런 마음이셨을까?’하고 짐작해보게 되었다. 어른들은 한 분 한 분 각자의 삶을 보여주며 나의 수업을 진행시켜 주었다.

겨울의 병원은 쓸쓸하다. 첫눈이 포근히 내려앉고 있다. 병상의 어른들은 몸으로 계절을 표현했다. 한여름엔 땀띠와 욕창으로. 한겨울엔 건조함에 가래와 감기 증상으로. 따스해지는 봄과 낙엽 지는 가을에는 사마와 다투는 열꽃으로. 병실의 공기는 비슷해 보여도 침상의 얼굴들은 계절을 비추고 있다. 창 밖으로 비친 연말 전식들이 어른들의 표정과 겹쳐 보이며 쓸쓸함을 더 했다. 먼저 오셨다 자제분들과 식사가 있다고 일어서는 바람할배 아주머니가 인사했다. 왜 누워 계신가 싶은 엄마는 언제나처럼 뽀얀 얼굴로 맞아주셨다.
“첫눈이 내려요. 엄마!”
주무시던 엄마는 아들 목소리에 반응하신다. 눈을 떠 보려 하지만 두꺼운 눈곱이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능숙하게 물휴지로 눈가를 적셔 놓았다. 조금 부드러워지자 슬그머니 충혈된 눈을 보이신다.
“잠깐만 기다리셔. 닦아드릴게”
정리 후 지그시 아들을 바라보신다. 다시 주무실까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는 길에 찍은 조명 아래 환하게 눈 내리는 영상을 보여드렸다. 엄마의 맑은 눈동자에 내리는 눈들이 쌓인다. 푸근하고 행복한 표정이다. 엄마가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게 되신 후부터 미끄러운 길 때문에 나는 눈이 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하얀 눈에 고마웠다. 뒤덮인 눈밭에 함께 드러누워 함께 뒹구는 것만큼이나 좋은 추억이었다. 깨끗이 모든 아픔을 씻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눈이 오나 보네?”
“네. 많이 와요.”
바람할배가 먼저 말을 걸었다. 주무시나 했더니 엄마와의 대화를 듣고 계셨나 보다.
“우리 마누라한테 프러포즈한 날 첫눈이 내렸지”
“정말요? 낭만적인데요”
“낭만은 무슨... 지독하게 추운 날이었는데. 날이 추워 떨었는지 긴장해서 떨렸는지 엄청 떨었어. 같이 살자고 하는데 말이야. 그러다 갑자기 푸근해지는 것 같더니 함박눈이 내리지 모야. 왠지 편안해지고 용기가 생겨 고백했지. 수줍게 자그마한 마누라 손이 내 손안에 쥐어졌을 때 기분은 잊히질 않아”
“들었던 거와 틀리게 엄청 낭만적이신데요”
달달하던 할아버지 목소리가 날카로워지며 말했다.
“뭘 들었는데? 가만. 그러고 보니 네 놈 지난번에 마누라한테 내가 바람피운 것들 캐 물었던 것 같은데. 쓸데없는 소리 자꾸 할겨?!”
“캐묻긴요. 오해세요. 오해. 그냥 이런저런 얘기하다 아주머니가 먼저 말씀하신 거예요”
“아무튼 쓸데없이 말 꺼내지 말어. 알았냐?”
“네. 그럼요. 다 듣고 계신데 제가 그러겠어요.”
괜히 눈치를 본다. 그러다 이때다 싶어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근데 할아버지. 어쩌다 바람 피셨는지 여쭤도 돼요?”
“뭐야? 금방 말했는데 그런 질문이 나오냐? 이 넘도 보통이 아니네”
“아니 뭐... 같은 남자로서 궁금하기도 하고. 암튼 좀 들려주세요”
“못 말리는 놈이네.”
잠시 뜸을 들인다. 워낙 말하기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는 가만히 말하기 시작했다.
“너도 들어서 알겠지만 내가 건설일을 했거든. 운이 좋았지. 좋은 선배 덕에 어려서부터 기술도 배우고 일을 많이 했어. 마누라 만나기 전부터 돈을 많이 벌었지. 집장사가 호황이었거든. 첫눈에 반해서 마누라와 결혼하고 자식들 셋 낳고. 한 10년은 정신이 없었네. 일이 일인지라 지방 가는 일이 많았어. 신혼 때는 나도 젊고, 애정도 넘쳤으니 아무리 멀어도 출퇴근을 많이 했어.”
“대단하신데요. 보통일이 아닌데요. 건설일이 몸도 많이 써서 힘드셨을 텐데요”
“힘들지. 여간 고단한 게 아니야. 어쩔 수 없이 애들이 좀 컸을 때부터는 여관 살이를 했지. 달방 잡아놓고 회사 식구들하고 지내는 거야. 일 년의 반은 그렇게 타지 생활을 했지. 가족들이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었지. 그  당시에 휴대전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허전해질 때가 많았어. 그럴 때면 술, 담배로 달래는 거여. 여관방이 아주 찌들 정도로 담배 뻑뻑 피워가며 술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단다.”
“그 맘은 이해가 돼요. 저도 그런 적 많으니까요”
“술이 문제야. 마시면 마실수록 느니까. 술이 느는 만큼 몸은 약해졌지.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면 필름이 끊기기 시작한 거야.  그날도 평소처럼 마셨는데 새벽에 눈 뜨니 웬 여자가 자고 있네.”
“여자요?”
“그래. 나도 깜짝 놀맀지. 담배 한 대 입에 물고 생각해봤지. 그 전날에는 좀 많이 마셨거든. 친했던 직원 하나랑 식사하고 여관 근처 호프집에 갔는데 그 집 여사장인 거야. 그 여자 혼자였거든”
“기억이 안 나세요?”
“그 집 들어가서 이런저런 농담 주고받은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거지. 내가 살면서 바람피우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바람이라고 해야 하나? 성욕이라고 해야 하나? 한 번 선을 넘고 나니 다음은 쉬웠지. 그 여사장은 내가 수작 걸어 같이 들어갔다는데 그건 알 길이 없고.”
“바람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면 다들 나름 이유가 있더라고요. 제 아버지도 그럴 것 같고”
“이유가 어딨나. 그냥 변명이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그냥 마누라에게는 커다란 상처일 뿐이야. 그 여사장 하고는 그 현장이 끝나고 마무리됐지. 그냥 서로 즐긴 거야. 거기서 끝나지 않는 게 문제야. 다음 현장에서도 또 그런 상대를 찾고 있는 거야. 내가! 바로 내가!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컸지. 생각은 그런데 몸은 이미 찾고 있어. 습관처럼. 마치 이미 그랬던 나인데 새롭게 찾은 내 습성이라고 해야 할까? 더 웃긴 건 마누라에 대한 마음은 그대로라는 거지. 미안함과 사랑이 함께 있어.”
“사람 마음은 어렵네요. 살다 보면 언제나 유혹은 있으니 이해도 되고. 할아버지도 이해되고 아주머니도 이해되고.”
“이해해서 뭐하냐. 겪어보지 않으면 진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네 부모님들도 아무도 모르는 사정이 있겠지”
“그렇겠죠. 저도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할아버지께 여쭙는 것이기도 하고요”
“처음에는 죄책감과 혹시나 가족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없어져. 그냥 자연스러운 거야. 오히려 당당해지더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기 시작하는 거야. ‘돈도 잘 벌어다 주고 주말이면 가족들과 시간도 잘 보내고. 그러면 됐지.’ 하구 말이야. 무서워 사람은”
“휴대전화도 없고 지방에서 그러신 건데 아주머니는 어떻게 아셨어요?”
“세상에 비밀이 없다. 정말. 지방서 차 타고 가는데 마누라 아는 아줌마가 본거야. 너무 웃기지.”
“대박. 세상 정말 좁네요!”
“깜짝 놀랐지. 주말에 집에 들어가는데 그 분위기 있어. 정말 싸한 분위기.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네. 이혼 서류 준비해 놓고 노려보는 그 눈빛은. 정말이지 저승사자를 봐도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만큼 상처가 크다는 얘기겠지.”
“그래도 이혼은 안 하셨네요?”
“빌고 또 빌고 끝도 없이 빌었지. 내 인생에 이혼은 없다고 정했거든. 그리고 마누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없었고. 나는 바람이라고 생각하질 않았었어. 그저 욕망을 해결하는 거라고 할까? 아무튼 그랬는데 들키고 나니 그냥 바람일 뿐인 거야. 나는 아니었거든.”
“누가 봐도 바람 같은데요!”
“나는 아니었다니까!”
“아. 알겠어요. 화내지 마시고 마저 말씀해주세요.”
할배는 거친 성격 그대로 화를 냈다.
“고놈. 승질 돋구네. 아니라고 나는. 근데 어디까지 했냐?”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물어보셨다. 신기하기도 했다. 목소리에 몸의 반응이 느껴진다는 것이.
“들키신 거요.”
“그래 들켰지. 헌데 끊기가 어려워. 한 번 몸에 배고 나니까 마누라 몰래 계속 여자들을 만났지. 맘은 괴로운 거야. 계속. “
“마음 같이 안 되니까 괴로우셨나 봐요”
“그러니까. 맘 같이 안되는 거야. 술도 끊어보고 다시 집에서 출퇴근도 해보고 여러 가지로 해봤지. 근데 이미 눈과 입이 움직인다. 수작 거는 습성이 말이지. 결국엔 병을 얻은 덕에 끊게 된 거지. 거 왜 술 좋아하는 사람들 몸이 고장 나서 먹고 싶어도 못 먹듯 된 거야.”
“무섭네요. 사람 습성이”
“누워서 더 괴로운 건 보살피는 마누라 보는 거였어. 말은 못 해도 정신이 좀 들고 나서는 순간순간 죽고 싶었어. 미안하고 미안해서. 표현도 못하고. 이렇게 몸뚱이 옆에서 나를 볼 수 있게 되고 느낀 게 있어. 침대에 누워있는 노인네들을 가만히 보면 다들 입이 동그란 모양으로 보이는 거야.”
그 말에 다른 환자들을 보았다. 정말 야옹이 아줌마처럼 입들이 동그란 모양으로 보였다. 할배도 그렇고.
“정말 그래 보이네요”
“내 생각에는 말하고 싶은 거야.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나야 당연 마누라지. 이미 지난 바람 핀 세월은 어쩔 수 없잔냐. 지금이라도 원 없이 미안하다,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보니 입 모양이 저런 것 같아.”
지나간 세월이었다. 나에겐 다가올 세월이기도 했다. 엄마의 입은 지긋이 다문 편안한 입모양이었다. 엄마의 상쾌한 입모양이 좋다.

 



며칠 후 할배와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번에는 또자 할머니가 함께였다.
“이쁜이 아들이 능력 있나 봐. 바람이가 그렇게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봤네”
지난번 할배와 나의 대화를 또자 할머니는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왜요? 이미 다 대화하셔서 서로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요”
“우리야 그런 대화할 생각이 있나. 다들 그날그날 대책 없는 불평만 늘어놓는 거지. 간병이 어쩌네, 간호사 주사가 어쩌네, 자식들 보고 싶은데 안 온다느니 그런 수다지”
“그러게 할멈들이 물어본 적이 없지. 궁금하지도 않을 테고. 네 놈이 아주 여우 같다니까”
할배가 핀잔 주 듯 말했다.
“어른들이 좀 이해하세요. 제가 공부하는 거니까요.”
“그게 공부가 되냐? 저 할멈 기억 잃어버리는 거나, 내가 바람피운 것들이 말이여?”
“엄마도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경험들을 하셨다고 생각해서요. 뇌출혈로 기억도 잃으셨고, 아빠가 집을 나가 혼자 자식들 키우신 건 바람 하고도 연관이 있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 더 궁금해져요.”
“고놈 나름 머리가 좀 돌아가네”
이해했다는 듯 말하는 할배의 말에 할머니가 답했다.
“그나저나 바람이가 마누라한테 그리 미안해하는지 몰랐네. 나름 감동이었어”
“미안하지. 누군 바람피우고 싶어 피웠나. 할멈 죽은 신랑도 바람피웠을 걸?”
“뭐야! 어디서 막말이야. 니랑 다 똑같은 줄 아냐”
“두 분 싸우지 마시고 얘기나 들려주세요”
항상 어린애들처럼 다투기 바쁘다. 두 어른들을 달래며 나는 질문을 이어 갔다.
“할머니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바람피웠으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생각도 하기 싫지만 끝이지. 그냥. 생각할 것도 없어. 네 엄마처럼 나도 뭔 짓을 하던 애들 데리고 혼자 살았을 거야. 그러고 보면 바람이 마누라가 여장부야. 아주 맘이 넓은 거야.”
“그럼 그럼 우리 마누라가 마음이 이쁘지!”
할머니의 말에 기분이 좋은 듯 할아버지가 말했다.
“좋단다. 부인들이 상처가 얼마나 큰지 남자들은 모를 거야. 하늘이 내려앉는 기분이지.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나야 직접 겪어보지 못했지만 내 아버지가 그랬지. 새엄마만 둘이 있었거든. 우리 돌아가신 어머니 뒷모습을 잊을 수 없어. 자식들에게 말도 못 하고 서럽게 우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 그 모습이 딸인 내게도 상처가 됐어. 정말 큰 상처. ”
“할멈 아버지가 그러셨어? 허긴 그 당시 아버님들 웬만큼 살면 다들 부인들이 둘셋은 있었지. 우리 아버지도 그랬고. 많았지”
“다 그렇지는 않거든. 내 생각에는 자식이 아무리 싫어해도 부모 닮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우리 신랑 만나고 나서는 그것부터 확인했지. 아버지나 어머니 부부 관계가 어떤지. 아주 평범하지만 화목했어. 더 고민도 안 했지. 부모가 그런다고 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나는 믿었어. 팔자라고 해야 하나? 같은 괴로움이 대물림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더라고. 고맙게도 우리 신랑은 시아버님처럼 너무 상냥하고 가정을 위해 최선을 다했지. 다만 아버님처럼 암으로 갈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말이야”
“묘하게도 그런 게 있나 봐. 나도 우리 아버지 다른 부인 얻어 사는 게 너무 싫었는데. 그래도 나는 다른 부인은 안 만들었으니 다행이지”
“다행 같은 소리 한다. 마누라 마음고생은 똑같거든.”
“아니여. 나는 마누라밖에 없다니까”
“알았네. 알았어. 잘했어요”
“누군 그러려고 그랬나. 나도 많이 후회하고 있다니까. 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내 나름 아무리 이유가 많아도 다 부질없지”
이미 지난 일이었다. 상처라는 것도 지난 기억일 뿐이었다. 그 상처의 기억으로 자신을 옭아매고 살지, 어떻게든 이겨내고 더 가치 있게 살아갈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할아버지 아주머니는 품은 듯하다. 그렇다고 다 용서가 되진 않았다. 가장의 외도는 당사자도 가족들도 마음 한편에 깊은 계곡을 파 놓은 듯 시린 바람에 언제든 노출될 수 있어 보였다. 오히려 병으로 침대에 누운 것이 할배에게는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편찮으신 덕에 가정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나는 조심스레 여쭸다.
“이것도 몹쓸 짓이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단다. 차라리 아프니까 온전히 마누라 옆에 있을 수 있고 딴 짓거리 안 하고.”
“다음 생에는 마누라 호강시켜줘라. 돈도 돈이지만 마음으로 흡족해야 해. 죽는 순간까지 여자는 여자여. 부는 바람에도 깔깔거리는 어린 처녀들만 여자가 아니야. 자식 낳고 엄마로서 사느라 스스로도 여자라는 것을 잊고 사는 거지. 여자는 여자여”
“그래야지. 저 이쁜 마누라 속을 타게 만들었으니 내가 10년을 누워서 온몸이 마비되고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겪겠지”
“끝까지 살아야 해. 죽으면 지금처럼은 못 만나니까. 올 때마다 눈 크게 뜨고 마누라 실컷 보면서 마음 전해줘”
할배가 조용하다. 모든 사건들이 지난 지금 모두가 피해자 같이 느껴졌다.
“아들. 네 엄마도 남편일도 자식들일도 다 마음으로 품었을 거야”
“네?”
할배의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조금 놀라 대답했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남자들이 어떤 말을 해도 전부 변명일 뿐이야. 결혼과 가정은 사랑도 있지만 신뢰이고 약속이니까. 근데 그 약속을 저버린 거잖아. 나도 그렇고 네 아빠란 사람도 그렇고. 그 와중에 자식들 잘 키워온 엄마들은 전부 이겨낸 거야. 엄마들을 잘 생각해. 저 할멈도 결국에는 바꾼 거잖아. 스스로 신랑의 바람 없는 인생을 살겠다고 정한 데로.”
“엄마들은 정말 위대하죠”
“맑은 물에 잉크 한 방울 떨어진다고 티가 나진 않거든. 그렇다고 스스로 괜찮다고 자꾸 한 방울씩 떨어뜨리다 보면 새까만 물이 돼버리는 거지. 나도 그런 거 같아. 잉크 떨어뜨린 건 나니까. 내가 어떤 말을 해도 결국 내 책임이지. 어떤 이유를 들어도 다 변명일 뿐이야”
“바람이가 오랜만에 바른 말허네. 지금부터라도 이쁘게 잘해. 누워서도 표현할 수 있으니까 자주 표현하고”
누워서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누워서 할 수 있는 게 뭐예요?”
“엄마 만나러 와서 이런저런 얘기하면 엄마 눈빛이 변하지 않던?”
“음.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져. 마치 다 알고 대답 하시 듯 또렷하게 바라봐 주실 때가 있죠”
“다 나름 말하는 거야. 대표적인 게 눈빛 신호 거든. 저 할배도 마누라에게 그렇게 계속 말하고 있고”
“할멈 말처럼 계속 눈빛으로 말을 걸고 있지. 우리는 눈빛으로 대부분을 말하니까. 우리 마누라는 척척이야. 목말라 바라보면 물 주고, 머리가 근질근질해서 말하면 긁어주고, 남진이 노래 듣고 싶어 말하면 노래 틀어주고. 그만큼 나를 애껴주는 거지”
“그럼 제가 봐 온 엄마 눈빛도 그렇게 말씀하신 거였네요”
“그럼. 누워서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정신은 멀쩡해. 그니까 아들도 맘껏 엄마한테 표현하고, 할배도 마누라한테 더 표현 잘해봐. 때 되면 다 느낀다”
누워있는 모든 분들이 끝없이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내가 느껴 온 엄마와의 대화도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많은 말씀을 하셨을 텐데 내가 못 알아듣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었다. 궁금하던 한 가지를 할배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나가 있는 제 아버지는 어떤 마음일까요?”
“독한 사람 같다. 네 아비도. 나야 어쨌든 마누라 옆에 붙어있었지만 그렇게 나가 있는 것이 쉽지 않거든. 남자들은 밖에서 뭔 짓을 해도 마누라 하고 새끼 있는 집으로 귀가 본능이라는 것이 있거든. 지금껏 소식 없이 사는 건 참 어려운 일일 거야. 맘 편치 않겠지. 네 놈 가르치려고 나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럴 수 있겠네. 바람이 처럼 집에 오가며 바람피우는 건 자식들 스트레스가 더 크지. 아예 나가 있으면 사람은 보질 않으니 생각을 덜 할 수 있게 되거든. 네 아비 덕에 너나 형제들은 엄마가 더 각별할 걸”
“네 맞아요. 그냥 안 계시니까 엄마 밖에 없죠. 생각할 것도 없고”
정말 그랬다. 나간 아버지 때문에 엄마가 고생한다고 누이들도 나도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만큼 엄마의 존재는 우리에게 전부였다.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만큼 열심히 살아온 엄마이기도 했다.
“신랑 보내고 내 새끼들 보며 나도 괴로울 때가 많았지. 그때 내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느낀 거는 그냥 낳아주셔서 감사하다는 거였어. 덕분에 좋든 싫든 이 세상 누리며 살아볼 수 있었으니까. 더 바랄 게 없더라고”
“그럼 그럼. 죽을 날 기다리며 누워있으면 너무 괴롭거든. 근데 누워서라도 마누라 보는 게 얼마나 행복한 지 모른다. 네 아비도 후회 많이 하겠지. 마누라와 새끼들 고생시킨 남자들이 말은 안 해도 얼마나 괴로운데. 이미 지난 세월 지금 와서 이러네 저러네 말해봐야 뭔 소용 있누. 아까도 얘기했지만 전부 변명일 뿐이지.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어디서라도 잘 계시다 생각하고 감사하다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엄마도 그럴 거야. 남편이고 뭐고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겠지. 그래도 네 형제들 보며 좋아하고 있는 게 보이니 엄마나 아버지에게 낳아주셔서 고맙다는 마음만 가졌으면 좋겠네.”
“바람이가 철들었네. 바른 소릴 다 허고.”
“이 놈의 할망구가 분위기 깨네. 오래간만에 진지하게 얘기 잘하는데”
“칭찬이야. 칭찬.”

죽음을 앞둔 어른들은 지금과 내일을 향해 있었다. 오히려 젊은 내가 과거에 파묻혀 사는 듯했다. 할배는 수많은 사연들을 ‘변명’이라고 했다. 각자 나름의 삶에 정답은 없겠지만 공감이 되었다. 변명이라는 것은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삶을 채우는 듯했다. 가만히 마주친 엄마의 눈빛은 상쾌하게 반짝인다. 변명 따위 필요 없는 상쾌한 인생이 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4. 인터뷰 - 바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