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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일 Jul 11. 2020

24. 손길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지루했다. 답답함이 가져온 지루함인지. 장시간 반복되는 일상이 어느 순간에는 숨 막히는 지루함으로 다가왔다. 엄마 집을 정리하고 한동안은 울적함에 젖어 있었다. ‘이것도 연습이겠지...’라며 마음을 다스려봐도 가라앉은 마음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다른 뜻이겠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어른들 말씀도 생각나곤 했다. 가족의 병을 함께 겪어가는 것은 결국 병과의 싸움이 아닌 지쳐가는 자신과의 싸움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경우 언제나 있을 것 같던 엄마 집이 사라진 후 감정적인 무게가 많이 짓누르는 듯했다. 마음이 무거워 그런지 표정조차 어두워졌다.


“아들? 뭔 걱정 있어? 얼굴이 말이 아니야!”
며칠을 오가던 나를 지켜보던 팀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별일은 없는데 기분이 계속 안 좋아요”
“병원 며칠 안 온다고 엄마 도망 안 가니까 걱정 말고 어디 바람이라도 쐬고 와.”
“그래야 할까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참. 엄마 욕창 다 없어졌어. 얘기 들었어?”
“정말요? 얘기는 못 들었는데 너무 감사하네요”
“간병인으로서 자존심이 있지. 우리 이쁜이 할머니 피부 뽀얗게 좋아졌으니 걱정하지 마”
“정말 감사합니다. 팀장님!”


욕창은 정말 무섭고 어려운 병이었다. 새하얀 옷감에 잉크 떨어지듯 조금만 소홀히 하면 순식간에 피부를 점령해버렸다.  하지만 다시 좋아지려면 하루하루 정성껏 체위 변경을 하고 약을 바르고 관리하는 수밖에 없다. 환자분들 중에는 욕창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돌아가시는 분들도 많았다. 가족도 아닌 간병인들의 보살핌 속에 욕창이 없어진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욕창이 없어진 것은 하루하루 성실하고 정성스러운 보살핌의 증명이니까. 팀장의 반가운 소식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쁜 마음으로 엄마 옆에 앉아 재잘거렸다.


“엄마! 욕창이 다 낳았데. 오랫동안 고생하셨어. 이제 깨끗이 더 편히 계셔.”


갑자기 엄마 집이 생각났다. 말씀드려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많이 서운하셔서 괜히 건강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머뭇거리며 고민하던 내게 배고파 할머니와 바람 할배가 말을 건넨다.
“아들! 이쁜이 욕창 없어졌다며? 축하해”
“저 친구들이 말 수는 적고 틱틱거리도 성실하게 일은 잘해. 그렇지, 할멈?”
“너는 맨날 할멈 할멈이냐. 누나라고 해”
“누나 같은 소리 하네. 같이 죽을 날 기다리는 사람끼리 다 친구지”
“못 말려 저놈의 싸가지는... 그건 그렇고 축하해 아들”
내게 말을 거는 건지 두 분이 싸우는 건지 티격태격하며 배고파 할머니는 엄마의 욕창이 없어진 것을 축하해주었다.
“그만 다투세요. 하하. 언제나 보기 좋으네요. 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저 간병인들에게 고마워해야지. 그나저나 요즘 왜 그렇게 얼굴이 안 좋은 거야?”
“그게 보이시나요?”
“다 보이지! 말을 안 해도 우리는 다 보고 있다니까”
“할멈 말데로 뭔 일 있냐?”
바람 할배도 함께 거들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엄마 사시던 집을 정리했거든요. 그 이후로는 계속 울적하고 맘이 안 좋네요. 제 표정이 그렇게 어두운지 몰랐어요”
“역시 그랬구나. 이쁜이 예상이 맞았네”
갑작스러운 할배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쁜이 예상’이라는 말은 엄마가 얘기했다는 말이었다. 너무 놀라 엄마 얼굴을 보고는 자세히 물어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바람 할배를 바라봤다. 말하려는 나를 앞서 배고파 할머니가 말했다.
“저런 주책을 봤나. 그 얘기를 아들 앞에서 하면 어째?”
“이런이런... 나도 모르게 그만 말이 나와버렸네. 뭐 어때! 알면 그만이지. 남 일도 아니고 지 어미 얘긴데 뭔 상관이야”
“아무튼 저놈의 입은 누워서도 못 말려. 에휴.”
두 어른들의 얘기에 나의 궁금증은 더해갔다.
“할머니! 엄마도 같이 얘기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잠시 조용히 있다 할머니가 말했다.
“그래 맞아. 바람이가 꺼내 줬거든. 좀 됐어. 집 정리하는 것도 이쁜이가 얘기하더라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미 엄마는 나와 어른들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
“근데 왜 말씀이 없으신 거예요?”
“가족 하고는 안 돼. 지난번에 얘기하지 않았나? 아무튼 가족 하고는 이렇게 대화할 수가 없거든”
바람 할배의 단호한 말에 좀 아쉬워졌다.
“너무 아쉬워 말고... 이렇게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복 받은 거야”
“그럼 그럼. 이 놈이 처음이지. 신기한 놈이야. 우리랑 이렇게 대화할 수 있다는 건. 그치 할멈?”
“신기한 일이지... 덕분에 우리도 즐겁고...”
우는 아기 달래듯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주려 바쁘다.
“어쩔 수 없죠. 근데 마음이 좀 이상해요. 엄마가 지금도 옆에서 듣고만 있는 거잖아요? 저도 그렇지만 엄마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텐데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마음 여린 할머니는 내 말에 공감했는지 불쑥 말했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이런저런 부탁하며 네게 하고픈 말들을 전하고 있는 거지!”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에요?”
“이 놈에 할망구 나한테 뭐라 하드만 자긴 더하네!”
바람 할배가 깜짝 놀라 배고파 할머니를 나무라듯 말했다.
“이 입이 문제야. 문제. 참 신기하게 이쁜이 아들하고 얘기하다 보면 별 얘길 다하게 되네”
“엄마가 부탁해서 말씀해 주셨다는 게 뭐예요? 말씀 좀 해주세요!”
“뭐 이렇게 된 거 얘기하자. 바람아 어때? 아들이 몸살 나겠다!”
“그려. 어차피 직접 대화하는 거도 아니고. 때 되면 다 알게 될 일인데. 지금 때가 되었나 보지”
어른들은 매달리듯 여쭙는 나의 요구에 합의를 한 듯했다. 배고파 할머니는 자상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언제였더라? 네가 처음 또자 언니랑 얘기했던 때 기억나?”
“그럼요. 어른들하고 얘기 나눈 것은 절대 잊지 못하죠”
“기특허네. 네가  또자 언니와 처음으로 긴 얘기 나누기 얼마 전에 이쁜이가 대화할 수 있게 되었지.”
“꽤 오래된 거네요?”
“그런가? 우리는 시간 개념이 없어 얼마나 되었는지 잘 몰라. 아무튼 바람이가 열심히 불러대고 나와 또자 언니도 조금 힘을 보탰어. 네가 매일 오니까 쉽지 않았는데 아무튼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게 됐어. 너도 알겠지만 이쁜이도 또자 언니에게 지지 않을 만큼 잠을 많이 자니까. 그것도 한 몫한 것 같아”
순간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정말 잘 주무셨다. 아픈 사람인지 피곤해서 주무시는 건지 모를 정도로 맛있게 잘 주무셨다.
“하하. 엄마가 잘 주무시긴 하죠. 근데 무슨 부탁을 하신 거예요?”
“수업이지. 아들이 배웠으면 하는 것들을 알려주고 싶어 옆에 있는 우리들 인생사를 수업 내용으로 삼은 거지”
“저도 수업이라 생각하긴 했어요. 병상 수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못 말려. 그 어미에 그 아들이네!”

가슴 뛰는 얘기였다. 할머니의 설명에 엄마 손을 잡고 있는 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눈치 보듯 대화를 나누며 엄마의 얼굴을 계속 살폈다. 이 순간에도 엄마는 평온히 주무시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 앉아 나를 보며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계신 듯한 푸근함이 밀려왔다.




“근데 어른들이 겪어오신 것들을 엄마도 다 아시는 건가요?”
물꼬가 터졌다. 나의 질문은 멈추질 않았다. 할머니와 할배는 친절히 말해주었다.
“너와 대화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우리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공유하는 거거든.”
“저야 잠깐 이겠지만 어른들끼리는 계속 같이 계시니 그렇겠네요. 그래서 엄마하고도 대화 많이 하신 거예요?”
“많이 하고 있지. 처음에는 누구나 그렇지만 가만히 듣고 있는 거지. 이 상황 자체가 적응이 안 되니까. 그럴 때 바람이 주책이 도움이 많이 되거든!”
“네? 할아버지 주책이요?”
“뭔 소리야. 내가 언제 주책을 부렸다고 그러는겨?”
“하하. 주책이지 이 놈아. 그래도 그 넉살 좋은 주책 덕분에 다들 금방 친해지잖아. 칭찬하는 거야”
“뭐 그렇긴 하지. 내 덕에 다들 편히 친해지지”
할머니의 말에 할배는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할아버지가 이런저런 얘기 많이 해주셨나 봐요?”
“바람이가 말문을 터주면 또자 언니나 내가 도와서 마음 편히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거야. 근데 이쁜이는 한참을 듣기만 했지.”
“듣기만 하셨어요?”
“잘 듣더라고. 그 어미에 그 아들이야. 너랑 비슷해. 이것저것 물어가며 우리 살아온 얘기들을 듣더라고. 그렇게 한참을 듣고 나더니 어느 날인가 부탁을 했어”
“어떤 부탁이요?”
“너에게 우리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엄마 가요?”
“우리 살아온 얘기들을 네가 들으면 엄마가 살아온 시간들을 이해하기 좋을 것 같다고 했지. 사람 사는 게 전부 틀린 것 같아도 또 묘하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거든.”
“저도 그렇게 느끼긴 했죠. 어른들이 살아온 얘기를 들으며 엄마의 삶에 대해 고민했으니까요”
“인연이라는 게 그런 것 같아. 인연이 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내 모습과 비슷한 부분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더라고.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도 있잖아?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그런 나의 인연들이 내 모습을 거울에 비추듯 보여주는 경우도 많고. 엄마도 우리들 살아온 얘기 들으면서 자신의 삶을 느낀 거겠지”
“할망구가 오래 누워있더니 엄청 똑똑해졌어.”
“가만있질 못하지. 하여간 알아줘야 돼”


장난스런 할배의 말에 할머니는 그러려니 말을 이어갔다.


“어디까지 했냐?”
“하하, 엄마 인생을 어른들 이야기에서 느끼셨다고요”
“그래그래. 나도 그랬거든. 또자 언니나 바람이 얘기 들으며 비슷한 삶을 느꼈으니까”
“전혀 다른 모습 같던데요?”
“그냥 보기엔 그렇지. 열이면 열 다 다르지. 겉으로 보기엔. 네가 우리들하고 대화하면서 제일 많이 들은 게 무슨 말 같아?”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선뜻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잠시 생각하며 떠오른 것은 ‘마음’이라는 단어였다.


“마음 같은데요? 모두가 나중에는 마음에 대한 얘기로 마무리하신 것 같아요”
“헛수고는 안 했구먼. 맞아. 마음이란다. 살아온 모습들은 틀려도 마음으로 느껴온 것들을 나누다 보니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거지”
“저도 조금씩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른들과 대화하며 엄마를 바라보면 더 그랬어요. ‘아들아! 엄마 맘이 이런 거였어’라며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네게 알려주고 싶었나 봐. 먼저 살아온 우리 얘기를 듣고 엄마의 삶을 느끼고 좋은 마음을 갖고 잘 살길 바라는 거겠지. 그러고 보면 이쁜이가 복이 많은 거야. 우리들 중 누구도 못해본 일이니까.”
“괜히 죄송해지는데요?”
“아니야. 우리도 즐거운 일이니까 그런 생각은 안 해도 돼. 너와 이쁜이 덕분에 우리들도 삶의 소중함을 더 많이 느끼게 되었거든. 먼저 간 또자 언니도 정말 고마워했지”
“갑자기 보고 싶은데요. 또자 할머니요”
“그러게 우리도 가기 전까지 보고 싶어 할 거야”
“근데 좋은 마음을 갖는다는 건 어떤 뜻이에요?”
“음... 뭐랄까? 현실에 마주한 많은 일들로 생기는 원망과 괴로움들을 감사함으로 바꾼다고 해야 할까?”
“저는 원망하며 살진 않은 것 같은데요! 사람이니까 당연히 괴로운 일들은 많지만”
“네가 지금 그렇다기보다는 이쁜이가 걱정되는 부분이겠지. 너도 이런 생각은 했었을 거야. 네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혼자 자식들 키우느라 힘들게 살다 저리 누운 건 아닐까 하고 말야”
할머니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마음이 있었다. 없다면 이상한 일이겠지만.
“그 생각은 지금도 하는 것 같은데요”
“사람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도 그랬으니까. 근데 그 생각의 시작이 원망하는 마음일 거야.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나 가족이 힘들어졌다는 마음이니까”
“정말 그러네요. 제 입으로 원망한다는 표현은 안 했지만 할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아요. 할머니의 경우도 아드님 잃고 나서 원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찼던 거네요?”
“맞아. 네 엄마가 내 얘기를 듣고 아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도 그 부분이야. 내가 딸 덕분에 마음을 바꾸고 인생이 바뀐 것처럼 아들인 너의 마음을 바꿔주고 싶은 거야.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란다. 혹시 모를 네 마음속의 원망이라는 그물을 걷어내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겠지.”
“누구보다 엄마가 아빠를 많이 원망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이 많아지네요”
“원망이 없진 않았겠지. 근데 그 아비 덕분에 자식들과 만났잖아? 그 이상 고마운 일은 없거든. 나도 그랬고. 그런 남편도 결국 내가 선택한 거니까”
“그렇긴 하죠...”
“원망은 정말 무서운 거야. 살아가며 원망하게 되는 일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는 거니까. 하지만 겪고 또 겪어보면 결국 자신에게 모든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 이쁜이는 네가 그 점을 빨리 알게 해주고 싶은 거야. 마음을 바꿔야 하거든. 원망스러운 일들이 자신이 더 커지기 위해 겪는 감사한 일들이라는 진실을. 그리고 이쁜이는 집 나간 네 아비에게 고마워하고 있단다!”

엄마가 아빠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말에 눈물이 고였다. 복받치는 감정에 엄마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꼭 잡은 손 위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다.




집안 한 구석에는 소주병이 쌓여갔다. 고단함이 쌓였는지 마음이 힘든건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밤이면 술 한 병에 마음을 풀고 잠자리에 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복잡함과 갈증이 함께 늘어가고 있었다. 초겨울의 스산함이 세상을 감싸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몸을 내려 길 건너 병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주차장 아름드리 나무들이 건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힘없이 나뭇잎들을 실어 보내고 있었다. 쓸쓸함이 병원 입구에 자물쇠를 채워가는 듯했다. 힘없이 들어서서 엄마 옆에 앉았다. 배고파 할머니의 얘기를 들은 후 더 신경이 쓰인다. 기운 있게 안심하시도록 해야 하는데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였다. 몸이 기억하는 데로 눈곱을 정리하고 여기저기 물휴지를 꺼내 닦아드렸다. 더 오래 머물기 위해 저녁 식사에 맞춰 직접 미음을 드렸다. 엄마 손을 만지작 거리며 한 방울씩 떨어지는 미음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게 할배가 말을 걸었다.


“실컷 울었나? 뭔 남자가 그리 눈물이 많아!”
“잘 계셨어요? 저도 모르게 쏟아져서 많이 울었네요. 죄송해요”
“내게 미안할 게 있겠냐. 너도 힘들 텐데 할망구 말에 마음이 더 힘들었겠지.”
“아니에요. 힘들게 있나요. 감사한 일이죠.”
“그래그래. 그렇게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여. 할멈! 아들 왔어!”
“배고파 할머니 눈 뜨고 계신데요?”
“상관없어. 저래도 이제는 다 듣고 말할 수 있는데 뜸 들이네. 아들 왔다니까?”
침대 너머 할머니를 바라보니 할배의 목소리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시끄러워 죽겠네. 왜 불러대?”
“할멈이 말을 꺼냈으니 마무리를 해줘야 이 놈도 맘 편히 지낼 것 아니야”
“뭔 마무리야. 사는데 마무리가 어딨나. 아무튼 바람이도 아들하고 꽤 정이 들었나 봐? 이리 챙겨주는 거 보니”
“쓸데없는 소리. 아들 울리지 말고 잘 설명하라고”
“알았네, 알았어. 웬 일 이레. 아들! 마음은 좀 괜찮아진 거야?”


어른들의 애정 어린 마음이 느껴졌다.


“그럼요. 괜찮아요. 두 분께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는 무슨. 그나저나 이쁜이가 네 아빠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말이 그리 감동이었어?”
“많이 놀랐져. 사실 지금도 저는 그 마음은 안 들어요. 근데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어요. 그 날 처음 듣고는 왠지 북받치더라고요. 누구보다 고생한 엄마가 그런 마음을 갖고 계신다는 게 믿기지도 않았고요”
“그렇겠지. 엄마도 저리 누워있지 않았다면 그런 마음 갖게 되지 않았을 거야. 그저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았겠지. 그게 사람이니까. 그러고 보면 병이라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지?”
“병은 싫은데 할머니 말씀은 이해해요. 저나 제 누이들도 그런 얘기를 주고받은 적이 있거든요. 엄마가 아픈 덕분에 저희들이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았으니까요.”
“살면서 병 없이 사는 사람이 있겠니. 네 엄마가 누워서라도 자식들 사랑하는 마음에 마음을 바꾸니까 자식들이 이쁜 마음 갖게 되는 거지. 엄마에게 고마워하렴.”
“정말 그러네요. 엄마 덕분에 좋은 마음을 갖게 된 거네요”
“그럼.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변화는 자신도 그렇지만 인연이 있는 주변 사람들을 함께 바꿔가는 큰 힘이 있단다.”
“마음의 변화라는 것은 참 대단하네요”
“그 덕에 우리도 침대 위에서 있는 힘껏 살기 위해 싸우고 있는 거지. 그리고 원망에 대해 한 가지 더 얘기해 줄 것이 있어”
“어떤 건데요?”
“지난번에는 주변에 대한 얘기를 해줬지?”
“네. 특히 아빠에 대한 원망이었죠”
“아빠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라고 바람이가 살아온 얘기를 들려줬다면, 또자 언니나 나는 자신에 대한 원망을 버리라고 얘기를 해준 거야”
“자신에 대한 원망이요?”
“아들이 엄마가 아픈 것도, 엄마가 오랜 시간 홀로 지내게 된 것도 모두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하며 스스로를 원망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살까 봐. 이쁜이가 제일 걱정하는 거였어”
“자책감은 언제나 갖고 있죠. 그걸 없애기가 어려워 매일 사죄하는 마음으로 찾아뵌 것도 있어요”
“그 마음이 느껴지니까 풀어주고 싶은 거지. 네 엄마가 혈관이 막혀 누웠다지?”
“네. 뇌출혈이요”
“혈관이 막혀 터지기 전에 어디로 라도 피를 내보냈으면 아마 저리 눕지는 않았을 거야. 밖으로 피를 흘려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한 거잖니? 마음도 어느 한구석이 막혀있으면 피가 몸 안에서 터지듯 가슴 안에서 터지게 되거든.”
“마음도 막히나요?”
“그럼 당연히 막히지. 스스로 막고 있는 거란다.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신인데 스스로 한계를 만들고 길을 막아 버리는 거야. 누워 있는 우리들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크게 느껴온 것이 있어. 자신에 대한 원망이나 자책이 스스로 만들게 되는 가장 큰 벽이라는 거였어. 그리고 누워서 다들 알게 된 것이 그 벽을 부술 수 있는 것도 자신이라는 거야. 근데 사람이니까 조금 도움이 필요해. 뭐랄까?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의 이야기라든가, 좋은 자극 같은 것들. 그런 인연들로 인해 마음을 바꾸고 벽을 허물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거든. 나 같은 경우에는 너도 알다시피 우리 딸이 그런 존재였고, 또 누워서 만난 병상의 친구들이 그런 존재였지”
“어른들과의 대화 덕분에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많이 하고 있죠. 자책에 대해서는 더 고민해 봐야겠어요.”
“그게 이쁜이가 원하는 거란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계속 대화하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물들여가는 거야. 그러다 보면 변화된 자신을 보게 되고 현실도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거든. 아들이 잘하고 있으니 한 가지만 당부할까?”
“네 말씀하세요”
“잘 참아야 해.”
“참으라고요?”
“그래 잘 참아야 한단다. 네 엄마가 잘 참고 인내한 덕분에 네가 이리 성장할 수 있었지?”
“그럼요. 그럼요. 엄마 덕분이죠”
“나도 여기 누워있는 사람들도 모두 이쁜이와 똑같은 마음으로 참고 또 참고 있는 거야. 다 나름의 역할이 있거든. 우리가 남의 손에 챙겨지는 환자들로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란다. 누워있지만 하루하루 참으면서 마음을 바꾸고자 노력하고, 마음으로 자식들과 인연 있는 사람들을 응원하며 함께 하고 있는 거야.”
“잘 참아야 한다는 거죠?!”
“그럼 그럼. 자책과 원망을 버리고 스스로 다독거리며 좋은 마음으로 잘 바꿔가야지. 그리고 잘 참아야 해!”


할머니의 말이 마음에 새겨졌다. 되뇌이고 되뇌이던 중 갑자기 엄마 집 생각이 났다.


“참, 할머니! 엄마는 집 정리하는 것을 어떻게 아신 거예요?”
“아 그거. 아들도 엄마 쓰러질 때 느낌이 좀 이상하지 않았어?”
“이상했죠. 정말 이상했어요”
“애정이 담기고 함께 했던 것들과 헤어질 때는 그런 느낌이란 게 있거든. 가족이나 부모 자식 사이처럼 깊은 인연과의 이별은 더 강하게 느껴지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제 헤어질 준비를 하라고 편지를 받는 것처럼 생활하면서 보게 되는 현상들로 알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억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알게 돼”
“신기하네요...”
“이쁜이가 홀로 오랜 시간 자식들처럼 함께 했던 집이니 느껴졌겠지. 질문 그만... 이 할망구 머리 아프다”
“하하. 다음에 또 부탁드립니다...”

이해할 듯 이해하기 어려운 얘기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할머니의 얘기를 들으며 조금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어느새 땀이 맺혀버린 꼭 잡고 있던 손으로 엄마의 볼을 쓰다듬었다. 내가 볼을 쓰다듬듯이 엄마는 누워서 아들의 마음을 보살피고자 온 힘을 다해 손길을 뻗히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내 가슴속 자책의 얼음벽을 따스한 손길로 녹여가고 있는 엄마의 온기가 느껴졌다.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픈 푸근한 손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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