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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일 Jul 20. 2020

25. 바다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세상에 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그렇다. 기다림 없이 생각하는 데로 바로바로 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장이라도 엄마가 일어나 함께 손잡고 거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수히 생각해보지만 현실은 인내의 연속이다. 나는 나름대로 스스로 잘 참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잘못된 생각이었다. 병상 수업을 진행할수록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을 느낀다. 잘 참는다는 것은 각자 나름의 가치를 만들어가고자 노력하는 속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엄마의 손길을 확인한 후로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보호막에 감싸인 듯 든든한 마음이 지속됐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연말. 어느새 가로수들은 반짝이는 전식들로 온몸을 감싸고 거리를 빛내고 있었다. 병실의 유리창들도 벗었던 비닐 패딩을 다시 입고 긴 겨울 준비를 마쳤다. 파도치듯 북적거리는 도심 속에서 병실은 고요히 잔잔한 물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엄마와 마주 앉아 좋아하시던 음악을 함께 듣고, 한참을 수다 떨고 온 금요일 밤. 오랜만에 아내와 희망이 함께 식사를 마치고는 영화 한 편을 보다 잠이 들었다.

눈부실 정도로 새하얀 병실이 보인다. 분명 엄마가 계신 병실이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 한가운데 엄마의 침대가 보였다. 친구분들은 어디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병실에 있는 건 엄마뿐이다. 저녁에 뵙고 온 모습 그대로 편안한 얼굴로 하얀 시트를 덮고 주무시는 것이 보였다. 걸음을 옮겨 엄마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가까워지지 않았다. 내 몸이 묶여있지 않은데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동굴 속에서 소리가 울리 듯 엄마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만 메아리쳤다.


얼마나 지났을까 병실 바닥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엄마의 침대 밑에 물이 차오른다. 서서히 물이 차 오르며 수위가 높아졌다. 내가 서있는 곳은 물이 차오르는 만큼 땅이 솟아올랐다. 침대의 다리가 잠겨가고 매트리스까지 잠기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급하게 엄마를 불러도 소용없었다. 온몸이 경직되고 다급함에 엄마에게 가려해도 움직일 수 없어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순간 차 오르던 물이 멈추더니 병실을 둘러싼 벽들이 깨끗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벽과 천정이 사라지고 맑은 하늘이 나타나며 눈부신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밝은 햇살에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렸다. 병실에 차 오르던 물은 맑은 바다로 변해 있었다. 잠시 바닥을 살펴보니 내가 서있는 곳은 모래사장이 되어있다.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니 투명한 바다 위에 작은 배처럼 침대가 둥둥 떠있었다. 끊임없이 엄마를 부르지만 바다 위에 떠 있는 침대 위 엄마는 평온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순간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며 침대가 출렁거렸다. 나의 몸은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밀려오는 파도에 발이 젖어가며 바닷물이 실어오는 모래로 덮여가고 있었다.


바람에 구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태양을 가리며 엄마와 나를 구름 그림자 속에 가두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는 제자리에 둥둥 떠있는 엄마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한 차례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태양을 가린 구름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빛줄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바다에 닿은 빛줄기는 황금빛 길을 만들며 엄마와 나를 비추었다. 몸부림치던 내 몸이 움직였다. 달려갔다. 마치 영화 속 초능력자처럼 바다 위를 달려 엄마에게 향했다. 침대에 다다르자 엄마가 몸을 일으키며 앉으셨다. 놀라움과 기쁨에 감싸여 침대에 다다랐다. 온화한 미소의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는 얼굴로 웃음 짓고 앉아서 나를 맞아주셨다.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기쁨에 넘쳐 엄마를 부를 뿐이었다. 손을 뻗어보지만 소용없었다. 건강하던 모습으로 미소 짓고 있는 엄마가 말했다.

“잘 살아야 한다! 싸우지 말고 너희들끼리 잘 살아야 한다!”

몇 번이고 같은 말을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의 엄마가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여전히 밝게 웃으며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씩 침대가 멀어지며 구름이 열리기 시작했다. 엄마와 나를 비추던 황금빛이 온 바다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수면 위에 떠 있던 내 몸은 어느새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허리를 찰싹거리며 간지럽히는 바닷물이 느껴졌다. 목놓아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침대에 몸을 싣고 나를 바라보며 수평선을 향해 멀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멀어지며 태양도 수평선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수평선, 태양이 하나로 겹쳐지며 밝은 섬광이 비추고 휴대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목덜미가 젖어 있었다. 사늘한 기분에 번호를 확인하자 병원이었다. 엄마가 입원하시고 처음 오는 병원 전화에 온 몸이 뻗뻗해지는 것 같았다.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수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드님! 병원으로 와 주셔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세요?”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정신을 차릴 시간도 없이 병원으로 출발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병원에 도착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차트를 보며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드님 빨리 오셨네요?”
“네.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주치의에게 물었다.
“새벽부터 어머님이 열이 많이 나세요. 사진 찍고 검사를 했는데 수혈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수혈이요?”
“소변으로 피가 같이 나오는데 심한 건 아니고요. 항생제도 넣고 있는데 수혈이 필요할 것 같아요. 혈액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걸리니 미리 동의서 받고 진행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많이 안 좋으신 건가요?”
“일단 기다려 봐야죠. 너무 걱정 마시고요!”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할 것이 없었다. 간호사의 안내에 동의서를 작성하고 서둘러 엄마 곁으로 갔다.


온통 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굴과 목덜미에 땀이 흐르고 겨드랑이에는 얼음팩이 놓여 있었다. 근래 보지 못한 힘겨운 표정의 엄마였다. 땀을 닦아내고 옆에 앉았다. 멍하니 지난밤 꿈을 생각하며 엄마를 바라봤다. 열이 날까 손도 잡지 못하고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엄마! 힘내세요. 아직 가시면 안 돼요. 가시면 안 된다고요. 엄마...!’


얼마나 있었을까 팀장이 다가오며 말했다.
“아들 많이 놀랐겠네. 땀이 나는 거보니 열 내리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팀장님!”


팀장의 격려에 마음 놓을 겨를도 없이 지난밤 꿈 생각에 사로잡혔다. 땀에 흠뻑 젖은 엄마의 모습에 꿈에 본 바다 위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아들의 외침에 침대에서 뛰어내려 힘껏 헤엄쳐 오신 것처럼 땀에 젖어 힘겨워 하는 모습에 가슴이 저렸다.


매 순간 침대라는 배에 몸을 맡기고 망망대해에서 삶과 죽음의 파도와 싸우고 계신 건 아닐까. 꿈에서 바라본 눈부시게 아름답던 바다가 원망스러워졌다. 그 눈부신 바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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