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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일 Jul 23. 2020

26. 결심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꽤 오래 걸렸다. 이전과 다르게 오랜 시간 열과 싸우셨다. 몸 어딘가의 염증과 출혈로 열이 쉽게 내리지 않았다. 계속되는 체내 출혈로 피가 모자라 결국 수혈도 하셨다. 누군가의 피가 엄마 몸에 흘러들어 가 생명을 연장해 주었다. 입원 후 처음으로 주치의와 간호사는 조심 스래 마음의 준비에 대해 언급했다. 반복되는 엑스레이 사진을 분석하고 항생제를 바꿔가며 열이 내리도록 모두가 노력했다. 그리고 일주일 엄마는 사우나에서 나온 듯 개운한 모습으로 회복하셨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엄마의 열병에 나와 누이들은 하루하루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마음 조리고 있었다. 누이들은 언제든 엄마에게 달려올 수 있도록 직장에도 말해 놓고 짐도 싸놓았다고 했다. 다행히 비상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의연하게 이겨내고 엄마는 우리 곁에 머물러 주셨다. 그렇게 진한 열병과 함께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 했다.

연초의 시간은 언제나 빠른 듯하다. 새해 인사에 분주하다 명절을 보내고 어느덧 2월이 되어 있었다. 엄마와 친구분들 모두 겨울을 무사히 견뎌내고 있었다. 연말 열병에 시달린 이후 엄마는 보름에 한 번씩 가벼운 열을 겪고 있었다. 다행히 하루 이틀이면 열이 내렸다. 예전과 다르게 열에 시달리는 엄마를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또 한 차례 열병을 겪고 노곤히 주무시는 엄마 앞에 앉은 2월 중순의 어느 날. 배고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쁜이 괜찮아졌지?”
“오랜만이세요. 할머니! 지난 연말에 엄마 많이 안 좋으실 때 이후론 목소리를 거의 못 들은 것 같은데요? 엄마는 괜찮으세요!”
“힘들 거야. 열이 나기 시작하면 정말 힘들어”
“근데 한동안 말씀들을 안 하시던데요?”
“네가 우리 얘기들을 정신이 있었겠냐? 이쁜이가 그리 힘든데”
“그렇긴 했죠. 정말 대단한 겨울이었어요. 참 제가 신기한 꿈을 꾸고 나서 엄마가 열이 나기 시작해서 더 불안했거든요”
“무슨 꿈? 이쁜이가 죽는 꿈이었니?”
“아니요. 그건 아닌데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그 꿈을 꾼 날 엄마 열이 시작됐거든요”
“어떤 내용인데?”
“병실에 엄마와 단둘이 있는데 바닥에 물이 차오르더니 바다로 바뀌었어요. 예쁜 바다요. 황금빛 태양빛에 엄마가 잘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는 바다 멀리 수평선으로 멀어지다가 잠에서 깼어요. 그리고 병원 전화받고 왔었거든요”
“그때 우리도 보고 있었지. 그런 꿈을 꿨구나...”

차분히 들어주셨다. 옆에서 듣고 있을 엄마가 신경 쓰여 말하기 어려웠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엄마가 가신다는 꿈일까요?”
“아무도 모르지. 정답은 없으니까. 아무도 모르지. 당장 죽는 꿈을 꾼다고 바로 가진 않잖아. 꿈은 꿈일 뿐이니까!”
“그런가요. 꿈을 꾸고 바로 그런 일을 겪어서 그런지 자꾸 신경 쓰여서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누구나 너의 상황에서 그런 꿈을 꾸게 되면 마음 쓰일 테니까”
“너무 신경이 많이 쓰여요”
“더 중요한 것이 있단다”
“중요한 것이요?”
“세상에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가는 경우도 많잖니?”
“그럼요. 요즘에는 특히 더하죠. 사고도 많으니까”
“그에 비하면 병원에 있는 우리들은 복 받은 거지. 가족들이나 간호해주는 사람들은 힘들겠지만 죽음을 맞이하기 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복 받은 거거든”
“가족들에게도 감사한 일이라 생각해요. 저나 가족들도 엄마가 쓰러지셨을 때 바로 가셨다면 정말 가슴에 맺혔을 거예요”
“그럼 그럼. 나도 그러니까. 자식들도 그렇겠지만 누워있는 어미 마음에서도 똑같아. 누우면서 바로 갔다면 가는 입장에서도 아쉽고 마음에 맺혔겠지.”
“가슴에 맺힌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에요. 근데 중요하다고 하신 건 뭔가요?”
“때를 만드는 걸 얘기하는 거야”
“때을 만들어요?”
“헤어짐의 때라고 해야 하나? 아니 새로운 시작의 때라고 하는 것이 좋겠네. 어미도 자식도 함께 그때를 만드는 거지”
“때는 기다리는 것 아닌가요?”
“때를 기다리고 때를 만드는 거지!”
“갈수록 어려운데요”
“어렵지 어려워. 지금껏 잘 해온 것처럼 차분히 담아가면 돼. 때라는 것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건 아니더라고. 물론 생각지도 못하게 때를 맞이하는 일도 많지만 말이야. 죽음의 때는 더 어렵지. 병상의 인내 속에는 때를 만드는 노력이 담겨있거든. 누워서도 바라는 바를 모두 이루고 가고 싶은 사람으로서 본능이랄까”
“지난번에 알려주신 엄마의 노력들이 때를 만드는 일이었네요?”
“그렇지. 네가 성장하는 것이 이쁜이의 바람일 테니까. 고놈 똑똑하네”
“때를 만드는 시간이었다니 왠지 기분이 안 좋은데요...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거야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들은 행복한 줄 알아야 돼”
“그렇긴 하지만... 그럼 할머니도 때를 만들고 계신 거예요?”

이해가 되는 만큼 마음은 힘들어졌다.

“당연하지! 너와 이쁜이랑은 또 다른 모습이겠지만 나도 나름대로 만들어가고 있지.”
“어떻게 해가시는지 궁금한데요?”
“거기까지 알려하지 마시고... 아무튼 이쁜이도 죽음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이기고 때를 만들고자 노력한 것처럼 아들도 헤어짐의 슬픔을 이기고 마음을 정하는 노력을 해야 한단다. 너의 꿈이 그럴 때가 되었다는 뜻일 거야”
“마음을 정하는 노력이요?”
“이제 보내줘야지. 이쁜이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마음껏 축하해줘야지. 아들이 엄마가 안심할 수 있도록, 걱정 없이 갈 수 있도록 보내는 마음을 정하라는 거란다”
“그걸 어떻게...”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하는 엄마의 얼굴이다.

“어떻게 그런 마음을 정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한가요?”
“단순히 감정적으로 다가갈 문제가 아니란다. 이쁜이의 노력으로 아들은 이미 느끼고 있을 거야. 네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천천히 잘 생각해보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이 정도인 것 같으니.”

어느 누가 눈앞에 엄마를 보내드린다고 마음을 정하는 일이 쉬울까. 엄마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분히 바라본다. 평온하다. 엄마도 나도 이상할 정도로 평온했다. 그리고 평온한 수면 아래 깊은 바다가 거세게 움직이듯 나의 마음은 요동쳤다. 병상의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챙기고 싶다는 마음에 하루하루 발길을 옮겼다. 1000일 가까운 병상의 시간이 흘러 뒤돌아보니 내가 아닌 엄마가 나를 챙겨주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진다. 문득 나의 결심은 엄마와의 이별이 아닌, 끝없이 엄마에게 의지해 온 내 자신이 엄마품을 떠나 홀로 비상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느껴졌다. 깊은 감사함이 솟구치며 마음 깊이 외쳤다.

‘보내드리자! 아쉽고 아쉽지만, 슬프고 너무 슬프지만 보내드리자... 둥지를 떠나 자유로이 비상하는 새처럼, 침대를 떠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실 수 있게 보내드리자. 새로운 엄마의 시작을 마음껏 축하해드려야지!’

두 손으로 감싼 엄마의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눈을 뜬 엄마가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들의 결심에 알았다고 대답하듯 바라보고는 다시 눈을 감으셨다. 병원을 나서니 맑은 밤하늘이 나를 반겼다.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고요한 도심을 거닐며 밤하늘에 마음을 비춰본다. 힘차게 차오르는 달이 나를 따라오며 응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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