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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선일 May 26. 2020

6. 8월 23일

“능인(能忍) = 잘 참는 사람”

더위가 심해진다. 고향 의료원에 모신 지 3개월을 넘기고 4개월을 꽉 채워가던 8월. 

서울의 요양병원으로 이원하게 위해 며칠 전 나는 고향에 내려왔다. 매일 오가며 하던 저녁 문안인사를 이제 서울에서 하게 되었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금요일 저녁 일을 마치고 내려왔다. 마음 좋은 회사 사람들이다. 3개월이 넘도록 새벽에 서울로 오는 나를 고맙게도 많이 배려해주었다. 엄마 홀로 기거하시던 집을 찾아 청소를 하고 정리를 했다. 아무도 없이 몇 개월을 비워둔 집에는 눈치 빠른 바퀴벌레 가족들이 여기저기 무단 입주해 있다. 쓸쓸한 집안에 오래 머물 자신이 없다. 귓전에 언제나 상쾌하게 말씀하시던 엄마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하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그리움에 젖어들 것만 같았다. 누이들과는 집을 그냥 두기로 했다. 언제라도 엄마가 돌아오시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게 작은 누이와 엄마 집을 오가며 엄마 집을 정리하고 월요일 오전 병원으로 향했다.

서둘러 간호사실과 원무과를 들려 행정처리를 마쳤다. 함께 병실을 쓰고 있는 환자분들과 간병인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꾸렸다. 엄마와 구급차로 함께 가야 하기에 나는 차를 서울에 두고 내려왔다. 최대한 짐을 줄이고자 미리 정리해 두길 잘한 것 같다. 어느새 구급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호흡기부터 심전도 기기까지 모든 조치를 마치고 구급차는 서울로 출발했다.

“엄마! 진작에 아들 집에 모시려고 했는데 아들 집 근처 병원으로 모시네...”

구급차에 누워 가만히 눈을 뜨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옆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 태생인 엄마는 결혼 후 누이들을 낳고 아빠의 손에 이끌려 이 곳에 터를 잡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이 곳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는 집을 나가셨다. 이유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부부 문제이니 두 분만이 아시리라. 아무튼 남겨놓은 재산도 없이 집을 나간 아빠 덕분에 엄마는 식당일을 시작으로 포장마차까지 하시며 우리 삼남매를 꿋꿋이 키우셨다. 그리고 병마와 긴 투쟁 속에서도 자식들 결혼에 손주들도 다 보시고 이렇게 다시 누우셨다. 제2의 고향이 된 이 자그마한 도시를 누워서 떠나시는 마음이 어떨지 왠지 애잔하다. 오랜만에 엄마와 단 둘이 마주하고 있으니 하고픈 말이 많았다. 처음 타보는 구급차가 왠지 고맙게도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잔잔히 느껴지는 차의 진동과 바람소리에 가만히 몸을 기댄 채 엄마 손만 만지작거렸다.
‘허름하고 불편해도 진작에 내 집에서 엄마 모시고 살았으면 이렇게 누워있지 않을 텐데... 미안해 엄마!’
엄마의 이쁜 눈을 바라보며 홀로 생각했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듣고 계신 것처럼 엄마는 지긋이 눈을 감으셨다. 내가 엄마와 나누는 침묵 속의 대화가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엄마의 눈빛과 호흡, 표정들을 뚫어져라 관찰하며 엄마의 대답을 마음속으로 떠올렸다.
‘말씀을 못하셔도 다 느끼고 알고 계시는 것 같아!’
설명하기 힘들지만 나는 느껴졌다. 우렁차고 상냥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엄마가 쓰러지시기 하루 전에 통화하던 일이 생각났다.
“얘야. 운전 조심하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알았지. 너희들끼리 잘 살아야 한다!”
“알았어요. 근데 왜 또 너희들끼리야! 엄마도 앞으로 20년은 같이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 거니까 자꾸 그런 소리 말아”
그것이 마지막 목소리고 대화였다. 왜 그렇게 짜증스럽게 말했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너희들끼리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은 엄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왜 항상 그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겠다. 다만 남편 없이 살아온 엄마의 삶을 보며 가족끼리 함께하는, 부부가 함께 하는 당연한 삶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지 일깨워 주시려 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말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귓가에 맴돌았다. 

‘너희끼리 잘 살아야 한다....’ 

내가 바란 것은 그게 아닌데, 결과적으로 나는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눈 감은 엄마에게 무언의 호소를 계속하고 있다.
‘거봐 엄마. 말이 씨가 된다고 너희들끼리 잘 살라고 하지 말고 우리 같이 잘 살아보자고 좀 하시지 그랬어’
투정도 해본다. 엄마는 고른 숨을 내쉬며 주무시는 듯했다. 미안함과 후회스러움이 가득한 나는 흔들리는 구급차의 진동에 리듬을 맞추듯 계속해서 마음으로 엄마에게 무언의 대화를 건넸다.
‘이제는 병상에서라도 함께 행복하게 살아요. 엄마가 원하는 만큼. 아들 얼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보여 드릴 테니 각오하세요..’
마음으로 엄마에게 말을 건넬 때마다 중간중간 엄마는 눈을 뜨고 바라봐주었다. 

‘알았다. 알고 있어’라고 아들에게 대답해 주듯이. 어느새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병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호흡기에 가래도 제거해 드려야 하는 엄마이기에 출발 전부터 걱정했지만 다행히 오랜만에 하는 드라이브를 잘 견뎌주셨다. 엄마의 손에서 땀이 나는 듯했다. 출발할 때부터 계속 잡고 있던 내 손 때문이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만지작 거리며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서울이야. 엄마. 오랜만이지? 아들 집에서도 가까우니까 잘 계시다 빨리 좋아져서 아들 집으로 같이 갑시다.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 보셔요”
내 말에 엄마는 가만히 눈을 뜨셨다. 잠시 후 차가 멈추고 뒷 문이 열리며 화창한 여름 햇살이 밀려들어왔다. 차에서 먼저 내린 나는 기지개를 켜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주차장에 심어져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와 은행나무의 파릇파릇한 잎사귀가 햇살을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엄마를 환영해 주듯 빛나는 햇살 사이로 마중 나온 간호사와 함께 엄마를 모시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간호사들의 조치 속에 엄마는 간호사실 바로 옆 침대에 자리 잡으셨다. 엄마의 머리 위로 입원 날짜와 생년월일, 나이, 이름이 적힌 종이가 붙여졌다. 


8월 23일... 햇살요양병원에서의 기나긴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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