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기억은 한참을 행복하게 한다.
새내기의 캠퍼스 투어를 집에서 한 나는 다음 해에는 글로벌하게 넓게 멋지게 살겠노라 다짐했다. 관련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찾아봤고 그중 국제교류대사라는 타이틀은 설레기에 충분했다. 대학교 1학년을 집에서만 보낸 내게 흥미롭고 자극이 되는 활동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이상한 이유로 시작했으나 내 세상에 색이 조금 더 많아졌다.
파트너 유학생과의 첫 수업 준비는 일주일 하고도 반이 걸렸다, 파트너도 나도 욕심이 많아 여러 가지 주제를 한데 모아 PPT를 만들고 영상 자료를 찾았다. 이후에는 처음 준비했던 수업을 바탕으로 연령과 성별 등에 맞춰 변경하기만 했다. 비대면으로 진행했던 수업도 기억에 남는다. 영상을 편집해 보내주면 수업시간에 모여 영상을 시청한다고 했다. 처음 수업 준비 때보다도 오래 걸렸다. 일정 문제도 있어서 일주일을 밤새서 편집하고 메일로 보내드렸었다.
활동을 명목으로 한 중학교에 처음 방문하게 됐다. 어른으로 학교에 간 건 처음이었다. 내가 선생님이라 불렀던 분들이 나를 높여 부르고, 선생님이라 부르고, 일 얘기를 하고. 처음에는 어색함과 신기함밖에 없었다.
내 파트너는 우즈베키스탄과 중국 사람 두 명이었다. 그래서 우즈베키스탄과 중국에 대한 세계 이해 수업을 했다. 당연히 나라 이름과 그 외 두세 가지 무엇 빼고는 잘 알지 못하는 나라였고. 학생들은 나더러 중국어 할 줄 알아요? 우즈베키스탄 어때요?라고 물었지만 나는 준비한 수업내용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다. 얼렁뚱땅 가르쳤고 학생들은 왜인지 좋아했다.
학생들은 어리기도 어렸고 밝기도 밝았다. 꽤 오래 교사를 꿈꾸면서도 딱 그 나이 때 친구들을 좋아하진 않았다. 오히려 귀찮음에 가까웠다. 그날은 왜 학생들이 예뻐 보였는지 모르겠다. 수업하러 가는 길에 온갖 일이 있었는데도 수업할 때는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그들은 순수했다. 다른 나라 사람을 신기해하며 이것저것 물어보는 모습,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리지만 모두 다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는 모습, 수업 보조에 불과한 내게 이것저것 묻는 모습 등.
이러쿵저러쿵 순탄하게만 흘러가진 않았지만 어쩌면 그래서 느낀 바가 더 많았다. 나와 5살~10살 가까이 차이 나는 어린 친구들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준다는 것은 왠지 모를 뿌듯함을 주었다.
어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픽업을 나와주셨다. 파트너와, 나와, 선생님. 이렇게 공통점 없는 세 명이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짧은 시간임에도 화제가 휙휙 바뀌었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나, 파트너의 문화권에 관한 이야기, 선생님의 대학 생활에 관한 이야기 등이다. 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울타리이자 탓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인상적이어서 일기장에도 적어둔 기억이 있다. 누군가에게 탓할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스승밖에 없는 것 같다.
다양한 국제교류 관련 활동을 하며 나는 각기 다른 나라의 유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런 활동 등에 참여하려고 했던 건,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였다.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가면 목소리는 다양해진다. 나와 유학생의 직접적인 교류, 유학생과의 교류와 더불어 어린 학생들과의 교류, 선생님과의 교류는 그들에게로 가서 색깔을 담은 이야기로 구성된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어떤 교류를 했을까. 나이로 치면 나는 그들의 딱 가운데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좀 재미있는 몇 시간이 되었을까?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시끌벅적한 이야기도 다른 색깔로 칠해진다. 몇 가지 색밖에 없던 시야에는 풍부한 색이 쌓이고 다채로운 목소리는 삶을 유동케 한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애송이는 이제 세계를 볼 수 있다.
<지구가 다채로울 수 있는 이유는>
스물 하나, 한 해를 정리하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