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사탕>
현대사의 비극적인 부분이 한 사내의 일생을 망가뜨려 놓는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순수했던 20세 청년 김영호가 민주화운동 진압군으로 동원되어 실수로 여고생을 죽이고, 경찰이 되어 물고문을 하는 등 타락하고, 아내가 바람이 나서 이혼하고, 1997년 외환 위기로 몰락한다. 그는 결국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지는데, 이 부분이 영화 <박하사탕>의 첫 부분이다. 시대와 함께 부식되어 가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영호의 일생을 역순으로 표현하며 보여주고 있다.
#시간여행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극적 구조’란 사건의 전개 방향에 따라 진행된다. <박하사탕>은 이 시학의 극적 구조를 해체하고, 그 해체 속에서 한 명의 인간을 찾고 있다. 비극이나 희극 같은 드라마(drama)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순서로 진행되는데, 이 순서를 역순으로 뒤집는다. 그럼에도 극의 연민과 공포는 놓치지 않는다. 또, 한 ‘사건’이 중심이 되어 비극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 민족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문화 원형인 시대상을 가져옴으로써,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에게 보편성을 확보하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공감을 획득할 수 있다.
기차가 움직이며 과거로 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유에 대해서, 감독은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박하사탕의 색깔과 맛 같은 첫사랑의 순수한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서”라고 했다. 박하사탕 같은 첫사랑 시절로 가는 시간여행이라고만 하면 순정만화 같은 상큼한 이야기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사실 이 여행은 한 남자의 20년이고, 그로 대표되는 시대는 역사적 상처를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극적인 이야기는 관객들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는 실재를 보여주어야 한다. 연민, 공포, 카타르시스는 새롭고 내밀한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미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을 다시 알아보는 것에서 생겨난다. 이야기 속에서 펼쳐지는 장면은 사람들의 삶 가운데 존재하는 특별한 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원형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왜 극적 행동을 보편적인 것 위에서 구축해야 하는지, 왜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보편적인 진실을 플롯 행동을 통해 구체화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극적 구조의 해체 속에서 김영호라는 한 명의 인간을 찾고 있다. <박하사탕>은 영호가 직면한 상황들을 나열하면서 김영호라는 인간을 드러낸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순수했던 청년 김영호가 민주화운동 진압군으로 동원되어 실수로 여고생을 죽이고, 경찰이 되어 물고문을 하는 등 타락하고, 아내가 바람이 나서 이혼하고, 1997년 외환 위기로 몰락한다. 그는 결국 순수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진다. 시대와 함께 부식되어 가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영호의 일생을 역순으로 표현하며 보여주고 있다.
#비로소 '인간'적인
사건의 순서를 뒤집기만 한 것인지, 혹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인지, 아니면 회상인지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영호가 회상하는 과거를 영화적 방식인 시각화로 보여준 것 같아서, 시간여행이 가장 적합해 보였다.
영호가 “나, 돌아갈래!”라고 하는 장면도, 순수했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간의 부식된 행동들을 후회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선험적인 ‘이성’에 의해서만 이러한 ‘성찰’이 가능하다고 본다. 물론 영호의 성찰은 어떠한 선한 결과를 낳는 성찰은 아니다. 그렇지만 악의 행동을 했던 자신을 후회하는 장면 이후에 그 행동을 거꾸로 나열하는 플롯은, 영화가 관객들에게 인간 김영호를 변호하는 것으로도 보인다. 시대상에 대해 한탄하면서도, 그 시대에 마냥 편승하는 평면적 인간은 아니었던 입체적인 한 명의 인간인 김영호를 보여주면서, 그로 대표되는 그 당시 우리들을 해명하고 있다. 영호가 시대에 오염된 행동을 보이지만, 그래도 성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본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호의 인간실존이 더러워짐으로써 영호의 순수한 본질까지 오염된 것으로 비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호는 ‘돌아가고자’ 한다. 이 성찰은 순수한 본질을 그리워하고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고유한 이성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동만 보면 가까이하고 싶진 않은 인물이지만, 미워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도리어 연민과 애착을 불러일으킨다. 이 영화는 ‘그래도 우리 애 착해요’라며 영호의 타락이 불가피했음을 말하고 있다.
영호의 순수와 타락은 ‘박하사탕’으로 엿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이자, 중요한 상징 중 하나인 ‘박하사탕’은 영호의 순수함을 말한다. 상쾌한 맛을 가진 하얀 빛깔의 사탕은 순수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적합한 모티프다. 영호는 받은 박하사탕을 전부 관물대에 모아둔다. 순임과의 추억을 보여주는 박하사탕은 민주항쟁에 진압군으로 동원된 부분에서 군인들의 발에 짓밟혀 부서지고 백색을 잃고 만다. 현실에 의해 오염된 영호의 순수함을 표현했다. 현장에 투입된 영호는 발에 총상을 입어 낙오되고, 한 소녀를 사살하게 된다. 짓밟힌 박하사탕에 영호가 겹쳐진다.
박하사탕이 혼자서 더러워질 수는 없다. 외부의 요인으로 인하여 오염된다. 영호도 자신 내부에 있던 것을 발현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괴롭힘 당한 한낱 개인에 불과하다. 당시는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그때처럼 체감할 만큼은 아니지만, 현실에 공격당하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순응하는 사람들과, 순수함을 잃은 채 현실만을 좇는 사람들, 순수를 사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영화는 1999년작인데도 지금의 우리에게까지 ‘순수’라는 물음을 던진다. 제목인 ‘박하사탕’을 먹는 것처럼 상쾌해지는 물음이었다.
#우리 세계의 사랑들
영국 소설가인 C. S. 루이스는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토르게에 의해서 양육받으며, 필리아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아가페에 의해서 완성된다"라고 말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희도는 이진과의 연애감정, 유림과의 우정, 재경과의 가족애 등을 보여준다. <박하사탕>에서 보여주는 에로스는, 순수한 사랑(순임)을 보여주기도 하고 날것의 사랑, 혹은 망가진 사랑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근 의류 관련 전시를 관람했는데, ‘다양한 종류의 사랑’이라는 주제를 보고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글로 표현된 작품의 의도 등을 읽었을 때는 진부했는데, 옷이라는 작품으로 표현된 그 ‘사랑들’을 보고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감동받았었다. <박하사탕>의 큰 주제가 사랑이라고 할 순 없지만, 사랑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바 있다. 너무 많이 다뤄서 진부한 주제인데 이를 어떻게 매체에 녹이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순임과의 장면에서 영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표정 변화가 잘 보이는 장면이나, 홍자가 바람을 핀 장면에서의 영호의 얼굴, 상처받은 영호의 표정 등에서 ‘사랑’이 와닿았다.
우리는 삶 안에서 계속 ‘사랑’한다. 이 영화는 시대로 인해 부식되어가면서도 순수를 놓치면 안 된다고 한다. <박하사탕>이 말하는 ‘순수’는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혹은, 그 순수를 찾기 위한 방식이 ‘사랑’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럼에도 삶은 아름답다
이창동 감독이 그리는 ‘삶’은 애증과도 같다. 영호가 한 학생을 물고문하는 장면에서 ‘삶은 아름답다’라는 메시지가 등장한다.
- 내가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은 게 있거든?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니?
- 예?
- 네가 일기에 그렇게 썼대? 삶은 아름다운 거라고.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해?
20년 후에 둘은 우연히 만난다.
- 삶은 아름답다.
- 예?
- 삶은 아름답다. 그렇죠?
<박하사탕>에서는 삶을 잔인하고 비극적인 것으로 그려내면서, 삶이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형사였던 영호가 학생에게 물었던 ‘삶은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을, 20년 뒤에 만나 또 물었다. 다칠 대로 다쳐버린 영호의 본질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내가 생각하는 삶의 아름다움이란 ‘유동성’이다. 철학 전공 수업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의 사고를 비교하는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인공지능은 실수가 많은 인간 지능을 뛰어넘을 수 있지 않냐는 질문자에게 나는 “실수나 흠집이 있어야 비로소 인간이고, 이 점이 인간의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미’가 이런 점을 보여주곤 한다. 좋아하는 예술 사조가 ‘논 피니토’다. 혹자는 이창동 감독이 삶을 너무 잔인하게 그려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모순적이라고도 한다. 이 부분에 대해 나는 흠과 틈으로 완성되는 논 피니토, 완벽하지 않은 완결, 대칭 속의 비대칭, 개연적인 우연으로 만들어낸 플롯, 열린 결말, 토르소, 여백의 미, 그리고 결말이 아닌 미완으로 달려가는 사건의 진행구조를 언급하고 싶다. 논피니토는 문자 그대로 “완료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완료되지 않은 작품이 표방하는 다양한 개인적 가치를 말한다. <박하사탕>에서 보여주는 비극은 삶의 아름다움에 반발하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을 뒷받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픈 부분이 있어야 삶에 더 소중함을 느끼는 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발견과 급반전으로 극적 효과와도 비슷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