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소나, 그리고 저항정신
평소에 잘 보지도 않던 영화를 계획 없이 봤는데, 그 날 본 영화는 <크루엘라>였다. 영화 <크루엘라>는 2021년 개봉한 월트 디즈니 픽쳐스 사의, 크레이그 길레스피 감독이 제작한 영화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고전 애니메이션 <101마리의 달마시안>을 각색했다. 원작의 빌런인 크루엘라를 새로운 서사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현대적 가치를 담아 주제의식을 끌어올렸다. 1970년대 영국의 패션 씬을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은 엠마 스톤은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를 연기한다. 1인 2역이 아닌 1인 1역이다. 이름이 다른 이유는 그가 두 개의 자아를 가졌기 때문. 독특하고 위험한 성격의 에스텔라는 본성을 감추고 에스텔라라는 착실한 아이로 만들어진다. 그가 성장하고, 또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만들어진 자아’인 에스텔라는 죽고, 크루엘라 드 빌만이 삶을 산다. 인격의 구분이 뚜렷하게 이뤄져 있었기에 가능한 설정이었다고 본다. 또한,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라는 정반대의 인격을 옷차림 등의 시각적 요소로 잘 표현했기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보는 재미도 있고 자아가 헷갈리지 않아 감상에 방해되지 않았다.
영화 Cruella에서 인상 깊던 장면을 꼽아보았다. 언제나 'For me'라며 자신을 건배사로 띄우던 남작 부인이 클라이맥스 직전, 상황에 휩쓸려 얼떨결에 ‘For Cruella’라고 건배사를 했다. 이 장면 이후 영화 서사의 절정이 시작되고 크루엘라의 복수 계획이 완벽히, 게다가 통쾌히 성공한다. 에스텔라와 크루엘라라는 두 자아가 협업해서 종횡무진하는 시작점이 된다.
그리고 남작 부인에게 복수하면서 절벽으로 떨어진 크루엘라가 죽지 않고, 다른 자아인 에스텔라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은 독특한 재미를 준다. 주인공은 영화 중반부에 “난 크루엘라로 살 거야, 에스텔라가 누구야?”라며 에스텔라라는 자아를 없앤다. 결말부에 이르러 에스텔라를 입은 주인공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지만, 크루엘라를 입은 주인공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에스텔라의 장례식을 치른다.
인격은 본래 짧은 시간에 크게 변화할 수 없지만, 우리는 상황에 따라 다른 인격을 보일 때도 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이를 심리학적으로 분석하며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외부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을 말한다. 본래 고전극에서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을 의미하지만, 이를 한 인간이 자신 속의 ‘어떠한’ 모습을 밖으로 ‘어느 정도’ 밖으로 드러내는가에 관한 타협으로 정의했다. 밖으로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진 않는다. 즉, 온전한 자신을 표출하는 데에 있어서 방패막이 되어주는 가면이 바로 페르소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면(페르소나)과 얼굴(본성)은 완벽히 구분되는가? 현실에서는 타협의 범위가 명확히 인식되지 않는다. 애초에 사회적 지위나 관계라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나열되는 것이기 아니라 전부 얽혀 있기 때문에, 페르소나 또한 어떤 것이 나의 본성이고, 또 어떤 것은 나의 본성이 아니라고 하기엔 곤란하다.
흔히 생각하는 페르소나에 대한 오류로는, 내게 본성과 페르소나가 하나씩 있다는 것이다. 페르소나의 순화어는 ‘다면적 자아’이다. 여러 측면의 자아라는 뜻이다. 페르소나가 본성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닐뿐더러, 딱 하나만 존재하지도 않는다. 소속된 집단 혹은 공간에 따라 많은 자아가 있을 수도 있다.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자아가 계속해서 분화되고 합쳐지고 성장하고 발달한다.
그리고 본래의 자신과 다른 자아가 나타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고치려는 사람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길티 플레져가 있다고 한다. 길티 플레져란 죄책감을 느끼거나 부덕한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보통의 평범한 자신이 아닌, 하면 안 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이 타락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페르소나에 대해 부정적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덧붙여,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한결같은 특성을 칭찬하곤 한다. 이 한결같다는 칭찬은 사람이 살아가며 잃곤 하는 순수함과 성실함을 말하는 것이지 변화와 성장 가능성까지 뭉개버리는 것이 아니다. 이 수식어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을 지향하고 추구하곤 한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크루엘라>의 배경은 1970년대 후반이다. 에스텔라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1960년대이다. 1960, 7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권위적인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이들의 저항이 컸던 시기이다. 저항 정신은 페미니즘, 히피, 펑키 등 당시 문화계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었다. 특히 패션 계에서 이러한 저항이 잘 드러났다. 기존의 실용적이지 못하고 화려함에 치중되어 있던 의복이 타파되었던 시기이다. 영화 <크루엘라>는 당시 패션계를 배경으로 한다. 기성 체제에 저항하며 시대가 갖는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은 크루엘라가 추구하는 '전복'이라는 키워드와 잘 어울린다. 에스텔라가 자신 자체(인 크루엘라라는 자아)를 억압받는 모습을 그린 것도 이 시대적 배경과 정확히 맞물린다.
또한, 남작 부인과 크루엘라의 대립 구도는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대립을 보여주며 변화와 성장 모티프로 이어진다. 남작 부인은 세련되고 변화하는 패션을 하려고는 하지만, 귀족적이고 계급화된 무엇이 패션에 묻어난다. 그에 반해 크루엘라는 펑키한 옷, 쓰레기로 만든 옷 등 참신하고 저항적 메시지를 담은 패션을 선보인다. 그것도 남작 부인이 마련한 행사장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말이다. 기사 사진을 찍기 위한 레드카펫은 남작 부인의 명예와 지위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고정되고 딱딱한 기성 세대를 뜻하기도 한다. 크루엘라는 쓰레기 차 위에서, 남작 부인의 차 위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신세대의 유쾌함과 당돌함을 보여준다.
결말 이후 짧은 쿠키 영상에서 크루엘라 드 빌의 지인들은 크루엘라가 보낸 택배를 받는다. 크루엘라가 선물한 새로운 자아다. 영화 <크루엘라>의 현대적 가치를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은 주인공의 페르소나들이 양립하기에 가치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억압하던 페르소나를 없애고 본성을 그대로 내보이는 결말을 보여준다. ‘마이웨이’나 ‘YOLO’라는 신조어를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현실과 통념에 억압되기보단 있는 그대로 자신을 내비치고 싶은 어떠한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생계 유지가 중요했던 반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이 현대의 우리 사이에서 가치가 점점 커지고 있다.
유행했던 ‘스트릿댄스 우먼 파이터’라는 예능 프로그램은 댄스 크루가 경쟁하고 성장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10대부터 20대, 30대의 젊은 여성들이 끼를 표출하는 이 프로그램은 비슷한 세대 사이에서 파급력이 컸다. 대한민국에 춤바람을 일으켰다나. 그들의 퍼포먼스 중 대중에게 특히 박수 받았던 것은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그게 뭐 어때?’라는 주제의식을 띤다. 프로그램 안에서 생긴 유행어도 그런 류의 말들이었다. 과거에 남을 깎아내리거나 저급한 유행어가 만들어졌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긍정적 유행어를 만들고 있다. 이런 트렌드를 머리와 몸으로 느끼며 생각한 것은, 철학의 ‘나’ 찾기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철학과도 유사하다.
영화 속 크루엘라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버린다. 물론 그것이 서사적으로 대단한 행위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서사 속에서 크루엘라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서 어떤 피해를 일으켜서 죽마고우 두 명에게 신뢰를 잃기도 한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거야! 내 맘대로 할 거야!’ 식이었다가 가족 같은 친구들에게서 신뢰를 잃고, 불길 속에서 죽다 살아난 뒤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들은 가족이었으며 함께 나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 말이다. 친구들은 크루엘라의 사과에 진심을 느끼고 다시 화해한다. 하지만 크루엘라의 멋대로인 태도는 이러한 서사적 도구 외에도 분명한 의의가 있다. 그로 인해 친구들과 지인들은 자신의 본성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고 귀 기울이게 된다. 결말 이후의 짧은 영상에서 선물로 새로운 자아를 주는 것도 그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루엘라는 자신과 자신의 내면의식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만의 삶을 그려나갔고 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에도 이르렀다. 이는 정신적, 사회적으로 모두 좋은 위치에 도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실존주의는 삶을 살아가는 ‘나’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주체로 인식한다. 실존적 진정성 등을 깨달으며 우리는 더 나다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야!”라고들 한다. 필자는 주인공 또한 각본과 연출 아래 움직이는 인형이다. 하나의 영화라는 완성된 무엇을 이끄는 건 연출감독의 역할이다. 삶이라는 극 안에서 조연들 사이에, 사건들 사이에 ‘페르소나(persona)’라는 배우들을 적재적소에 배치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배우의 애드리브는 인생을 조금 더 흥미진진하게 하는 모호함이라는 미완의 가치가 될 수도 있다.
영화 <크루엘라>는 융의 페르소나라는 개념을 보여주고, 시대적 배경과 함께 저항 정신을 보여준다. 히피 문화, 펑키 문화, 페미니즘 등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서 삶에 적용하고 다른 이에게도 주체적인 삶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은 분명한 의의가 있다. 크루엘라는 자기 멋대로에 사고만 치는 빌런으로 그려지지만, 그로 인한 매력은 모든 관객이 인정할 것이다. 과거의 것을 과거에만 두지 않고, 초점을 두는 인물을 바꾸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주제의식을 담았다는 것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좋은 작품인 것 같다. 고전을 새로이 스토리텔링한 것 중 잘된 예라고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한결같을 필요는 없다. 다양한 페르소나를 갖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삶에 있어서 주체가 될 수 있다. 삶이라는 극 안에서 ‘페르소나(persona)’라는 배우들과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것은 삶을 더 흥미롭게 한다. 빌런 없는 서사는 다소 지루하다. 모호함과 함께 순간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주체적인 삶이 아닌가! ‘나’를 찾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 것 같다.
<빌런이고 아니고가 뭐가 중요해>
잘 보지도 않던 영화를 우비 쓰고 보았던 스물 하나,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