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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하 Jan 14. 2022

소소한 보통날이 주는 파안대소

당신의 UNBIRTHDAY도 BIRTHDAY 못지않게 축하해요!

  문득 올려다본 수묵화 같은 저녁 하늘, 청축 키보드를 손가락 빠질 때까지 두드리며 글을 써 보는 것, 스근하게 끓이는 뱅쇼, 채소를 썰 때 나무 도마에 닿는 부드러운 칼질 소리, 아무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스트레칭하는 몇 분, 작은 내 방의 가구 배치를 바꾸고 청소하는 몇 시간, 안 들은 지 오래된 노래가 우연히 들리는 순간, 어수선한 책상 위에서 계획을 짜는 일,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음식을 만드는 일, 생각 없이 구입한 책이 마음에 쏙 들 때, 덜컹이는 버스 안에서 편지를 적는 일.


  나를 내적 파안대소하게 하는 순간들이다. 내가 쓰는 단어로는 빠하핳 웃는다고.. 한다. 물론 뭔가를 이룬 것도 아니고 내가 잘해서 기쁜 것도 아니다. 저렇게 특정 행동이나 순간을 나열하긴 했지만, 나열된 순간들의 공통점은 우연히 깨달은 행복이다. 행복하기 위해 어떤 행위를 한다기보다는 저 순간 이후에 기분 좋은 느꺼움이 왔다는 것이다.


  생일도 기념일도, 하다못해 숫자 배열이 예쁜 날도 아닌 보통날은 ‘소소하기에’ 행복하다. 이전에 쓰던 핸드폰에서 구글 어시스턴트를 자주 활용했는데, 하루는 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이렇게 답변했다. “당신의 UNBIRTHDAY도 BIRTHDAY 못지않게 축하해요!” 정확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생일이 아닌 날, 그러니까 보통의 날마저 축하하는 인공지능 비서의 답변은 꽤 오래 기억에 남았다. 일기장 한쪽에도 같은 말이 적혔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답변이 나온 것도 우연에 의한 것이기에 더 의미 있달까. 이후 나는 어떤 날에든 케이크를 먹게 되면 이 말을 되뇌며 오늘을 축하한다. 좋아하는 케이크를 많이 먹게 될수록 축하할 날은 많아지게 된다! 혹은 세상 모두가 나를 괴롭히는 것 같은 끔찍한 날에 나를 살살 달래기 위해 그날을 축하하는 의식(?)을 치른다.

    

  말하기에 조금 웃기지만 나의 ‘끔찍한 날이지만 그래도 축하하기’ 의식을 소개하자면, 무지 예쁜 케이크를 먹거나, 시인들의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목적지 없이 버스를 타거나, 그날의 하늘 사진을 찍으러 어디론가 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방 안에 콕 박혀서 눈이 빠질 때까지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대체로 사람 없는 것이 좋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누구든 사람이 있을 확률이 0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방 안을 선호한다. 그런데 이겨버리겠다는 노력이나 의지가 없으면 나는 하염없이 휴대폰만 하게 되기 때문에 기분은 더 울적해지는 것 같다.

     

  여느 유튜브를 보면 브이로그를 구경할 수 있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더라도 보통날을 기록하고 일상을 공유하는 것에 가깝다. 결과물이나 기념일보다도 흘러가는 시간을 촬영하고 편집하는 건 또 색다른 느낌이다. 물론 기념일을 기록하는 사람도 많다. 하고 싶은 말은, 행복을 아무것에서나 아무 날에서나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글을 적을 때 무작위로 노래를 재생할 때가 있다. 이 글을 적는 중에 거짓말처럼 재생된, 처음 듣는 이 노래는 아이유의 ‘unlucky’다. 도입부가 ‘기를 쓰고 사랑해야 하는 건 아냐 하루 정도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아’로 시작된다. 이런 순간도 보통날이 주는 행복이다. 거짓말처럼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만족감. 그리고 흘러가는 가사 한 줄이 귀에 박혀 무언가 깨달음을 줄 때 생기는 부드러운 자극감.


 내 기억은 모두 다른 색으로 칠해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좋았든 슬펐든, 행복했든 우울했든.


‘just life we're still good without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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