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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Feb 18. 2019

글쓰기 인문학 10강

1강. 설명-동양 최초의 인문학 '논어'

동양 최초의 인문학논어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야말로 동양 최초의 인문학자들이었다. 그들의 언행이 수 천 년 동안 동아시아인의 삶의 지표가 되어 왔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공자의 인문학은 인간을 짐승으로부터 확실하게 분리시키려는 체계적인 기획이었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공자 교단(敎團)을 만들어 자신의 기획을 실천에 옮겼다. 주유천하는 자신의 기획으로 이 세상을 바꾸어보려는 야심 찬 시도였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나이 들어 다시 고향에 돌아온 공자는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기치로 내 걸고 새로운 인간상의 창출을 위해 마지막 힘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논어』다. 『논어』는 공자의 언행을 모아놓은 책이다. 제자들이 합작이다. 누구 한 사람이 저자나 편자로 나서지 않았다는 게 재미있다. 행여라도 ‘나’의 글쓰기가 되면 경전으로서의 의미가 많이 퇴색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런 시스템을 취한 것이다.  『논어』도 그렇지만 다음의 인용문도 ‘나’를 가급적이면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문맥을 다라 읽다 보면 누군가 강한 어조로 자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나’는 안회를 두둔하고 자공과 자로를 박대하는 『논어』의 ‘나’와는 많이 다르다.    

   

<번듯한 그릇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현달(顯達)한 이가 자공(子貢)이다. 똑똑하기도 했고, 이재(理財)에도 수완이 있었다. 기질도 선(善)해서 스승의 야박한 평가에도 잘 견뎠다. 예나 제나 가진 것이 좀 있으면 남들로부터 질시의 시선을 받기 마련이다. 자공이 그랬다. 실제적인 공자 교단의 재단 이사장이면서도 스승으로부터는 기여한 만큼 크게 평가받지 못했고 다른 제자들로부터는 요즘 말로 강남 좌파 아니냐는 식의 부러움 섞인 질시를 받아야 했다. 공자는 끝까지 그를 ‘그릇’으로 취급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언감생심, 자공에게는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경지였다. 안회가 일찍 죽자 공자는 자공을 젖히고 증삼(증자)에게 의발을 전수했다.     

... 단 목사(端木賜)는 위나라 사람으로 호를 자공이라 했고 공자보다 나이가 31세 손아래였다. 자공은 변설에 뛰어났으나 공자는 항상 그의 변설을 억눌렀다. 언젠가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너는 회(回, 안회)와 비교해서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사(賜)가 어떻게 회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 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데, 사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 

자공이 그 후,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 공자에게 물었다.

“사(賜)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너는 그릇이다.”

 “어떤 그릇입니까?”

 “호련(瑚璉, 매우 좋은 그릇)이지.”

어느 날 진자금(陳子禽)이 자공에게 물었다.

“중니(공자)는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주나라 문왕, 무왕의 도는 아직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고 있소. 어진 사람은 그중에서 큰 것들을 알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그중에서 작은 것들을 아오. 어느 것 하나 문왕, 무왕의 도 아닌 것이 없으므로, 선생님은 어디서나 배우지 않는 것이 없소. 그러므로 일정한 스승이 있을 리가 없소.”

진자금이 또 물었다.

“공자께서 어느 나라에 계시든, 반드시 정치에 관여하게 되는데, 공자 쪽에서 요구해서 그런 것입니까, 아니면 저쪽에서 요구해 오는 것입니까?”

 “선생님은 온(溫) 량(良) 공(恭) 검(儉) 양(讓)의 덕을 몸에 갖추고 계시므로 자연 그런 것이오. 선생님은 세상을 건지기 위해 각국을 돌고 계시므로 선생님 쪽에서 요구하고 계신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요구하는 방법은 벼슬을 찾아다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오.”

언젠가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집이 부유해도 거만해지는 일이 없고, 가난해도 비굴해지는 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그건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난이니 부니 하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 빈부 같은 것을 초월해서, 가난해도 도를 즐기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겨낼 수는 없다.”

증삼(曾參, 증자)은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자를 자여(子輿)라고 하며, 공자보다 46세 손아래다. 공자는 증삼이 효도에 능통한 것을 인정하고 그에게 더욱 가르침을 주어 『효경(孝經)』을 짓게 했다. 그 뒤 증삼은 노나라에서 죽었다. [『사기』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     

공자와 중요 제자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추가 가능하다. 먼저 자로와의 관계다. 공자가 자로를 냉대한 까닭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공자에게 자로는 하나의 그림자 인격이었다. 그는 공자의 물리적 힘(force)이기도 했고, 욕망의 대리 분출 자이기도 했다. 그의 여전한 위정지도(爲政之道)에 대한 집착이 공자를 양가감정으로 몰아넣는 측면이 있었다. 자로가 공자의 ‘이념의 사생아(데려온 자식)’로 자리매김 될 수도 있다는 유추는 그런 면에서 가능하다(이때 안회는 ‘주워 온 자식’이 된다). ‘주유천하(周遊天下)’로 대변되는 공자의 정치적 야심을 자로가 물려받고 있다는 것이다. 실패한 야심가로서 공자는 그러한 자로와의 정신적인 혈연관계에 대해 애증병존의 양가감정을 드러낸다. 그림자 인격은 언제나 냉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만큼 무의식적인 집착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공자는 자로를 아끼며 냉대한다. 다른 하나는 제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교사로서의 방법적 선택(교수법)이다. 자로는 기질이 과격하고 하나 들으면 하나만 알아서 늘 앞서 나가는 성격이 있었으므로 공자는 언제나 그를 말리는 입장에 선다. 하나를 알면 그것에만 매진하는 성격이었으므로 늘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의 문법으로 그를 가르친다.

자공의 경우는 ‘자공의 자질(資質)’ 자체가, 공자의 교육관으로 볼 때, 이미 고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객관적 측면과 공자의 콤플렉스(잘난 제자에 대한 스승의 견제 심리)라는 측면, 양 방향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안빈낙도(安貧樂道)로 일관하는 공자 말년의 교단(敎團) 목표를 두고 볼 때 그런 맥락 안에서는 자공(자공의 성공)은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집이 부유해도 거만해지는 일이 없고, 가난해도 비굴해지는 일이 없으면 어떻습니까?”라고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스승의 평가가 지나치게 인색한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그건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아직도 가난이니 부니 하는 것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다. 빈부 같은 것을 초월해서, 가난해도 도를 즐기고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겨낼 수는 없다.”라고 대답하면서 자공에게 지족안분(知足安分, 제 분수를 알아서 편안하게 살 것)을 권한다(이 때 ‘공자의 콤플렉스’가 거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공은 공자 교단의 실제적인 물주(物主)였다. 공자도 인간이었던 만큼 스스로 제자에게 업혀 지내야 하는 상황을 그리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라는 심리학적인 유추도 가능하다.

안회와의 관계에서 공자가 보여주는 칭찬 일변도의 몰입적인 인정 태도는 안회야말로 공자가 주장한 안빈낙도의 화신이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공자가 말년에 안빈낙도를 하나의 이념으로 승격시키려고 노력하였지만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가능이나 한 일인지는 안회가 나타나기까지는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안회의 역할은 공자의 가르침을 ‘황금의 언어’로 만드는 것이었다. 안회가 있음으로 인해서 공자의 말은 지상에서 실현 가능한 가르침이 될 수 있었다. 하나의 이상적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속하는 규범적 언명의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자가 안회를 그렇게 떠받들었고(자신보다 뛰어난 제자라고 말했다), 그가 죽었을 때, “내가 회를 제자로 삼은 뒤부터는 다른 제자들이 더욱 나와 다정해질 수 있었는데…….”라고 울면서 탄식하였던 것도 모두 그러한 맥락 위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안회, 자로, 자공, 증삼을 보면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와 사제 관계의 일단(一端)이 선명하게 읽힌다. 본디 그런 식으로 오래 삭힌 관념성 인물들은 여러 가지 설명의 욕구에 잘 부응하는 법이기도 하다. 일찍 죽은 안회는 공자 교단의 이념적 지표다. 안회의 죽음이 공자 교단을 떠받치는 이념적인 힘을 만들어낸다. 주유천하가 실패로 귀결되고, 폐족 취급을 받던 공자 교단이 다시 살게 된 데에는 안회의 존재가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의 살신성인이 없었다면 공자 교단은 벌써 잊히고 말았을 것이다. 자로 역시 공자 교단의 한 이념적 지표다. 그는 실패로 승리하는 인물이다. 그의 물음은 언제나 보통 사람의 생각을 대변한다. 성질 급하게 나가서 싸우다 죽는 그의 말로(末路)는 항상 배우는 자들의 생생한 모범이 된다. 자공처럼 똑똑하고 이재에 밝아서 실제적인 공자 교단의 물질적 후원자이지만 출신성분의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도 있다. 그는 그릇 중의 최고 그릇, ‘호련’에 만족해야만 한다. 그에 대한 공자 교단의 푸대접은 역설적으로 교단의 수명을 영구화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안회, 자로, 자공은 공자 교단의 핵심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로만큼 한계도 컸다. 무색무취, 엉덩이 무겁게 공자의 말씀만 적고 있던, 효심 강한 증자가 공자 교단의 계승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소이가 여기에 있다.<양선규, 페이스북>


위에 인용된 <번듯한 그릇>은 공자와 그의 세 제자에 관한 설명이다. 사기(史記) 열전(列傳)의 내용을 보고 자신의 소감을 밝힌 글이다. 설명의 방법 중 해석에 속한다. 옛 기록을 읽고 자신의 입장을 살려서 그 심층적 의미를 풀어서 말한다. 이 글의 핵심 요지는, 세 제자가 공자에게 어떤 의미이고 가치인가, 그들이 그렇게 자리매김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젖히고 증삼이 후계자가 된 까닭은 무엇인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먼저 이 설명에서 ‘나’는 어떤 인물인가부터 살펴보자. 글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논어 관련 지식이 어느 정도 비축되어 있는 인물이다. 원전 강독에 참여한 적이 있거나 논어 해설서를 몇 권 읽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심리학적 식견도 조금 가지고 있다. 그쪽 용어가 자연스럽게 설명 코드(code)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리 짐작된다. 마지막으로 비교·유추 능력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설명의 글쓰기에서는 비교·유추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비교적 큰 편인데 이 글 역시 그것에 의지해서 논리가 전개된다. 

인용된 사기 열전의 원 기록에는 자공의 재력에 대해서 직접 언급된 바가 없다. ‘변설에 뛰어났다’라고만 적고 있다. 자공의 질문 중에 나오는 ‘집이 부유해도 거만해지는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그것이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임을 알 수 있는 정도다. 물론, <번듯한 그릇>이 옛 기록에 대한 현대적 해석 행위의 일환으로 지어진 글이라고 했을 때 그 정도의 기록 사실만 가지고 자공이 ‘공자 교단의 실제적인 물주’였다고 유추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다른 책에서 읽은 내용(많은 사람들만 아는 것일 수도 있는)을 필요한 만큼 가져와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안회와 자로를 ‘주워 온 자식’과 ‘데려온 자식’으로 비유한 것은 명백한 ‘나’의 독자적인 활동이다(이 부분은 나중에 다시 설명한다). 

② 다음으로 이 글의 균형감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살펴보자. 안회, 자로, 자공 세 제자 중에서 자공에 대한 기록만 인용하고 나머지 제자들의 일화는 해석을 가미한 요약적 설명으로 대신하고 있다. 자공은 ‘번듯한 그릇’을 넘어설 수 없다는 내용을 인용함으로써 질박한 그릇이었던 자로와 그릇의 경지를 훌쩍 뛰어넘은 안회를 자연스럽게 비교 · 설명하고 있다. 자공에 대한 공자의 평가를 하나의 연결 고리로 삼아서 독자의 호응을 구하고 글의 흐름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글의 흐름이 ‘번듯한 그릇’이라는 제목에 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③ 마지막으로 ‘몸을 던지는 글쓰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자공이 주인공인 <번듯한 그릇>이라는 글은 안회와 자로가 주인공인 <주워온 자식, 데려온 자식>에 이어서 쓴 글이다. 앞에서도 일부 설명되기도 했지만, 안회와 자로를 ‘주워온 자식, 데려온 자식’으로 단순하게 개념화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 부담이 뒤따르는 일이었다. 설명에서는 가급적이면 회피해야 할 외줄 타기의 위태로운 글쓰기를 강요하는 속단(速斷)이 될 수도 있었다. 안회는 공자의 제자였지만 스승의 가르침 안에만 머물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였다. 그를 공자 말년의 삶을 해석하는 하나의 ‘그릇’으로 사용하는 것은 안회라는 인물의 정체성과도 모순되는 일이었다. 안회는 공자에게 입체적인 의미와 가치였던 인물이었다. 안회가 죽자 공자는 하늘이 자기를 버렸다고 탄식했다 그리고 “내가 회를 제자로 삼은 뒤부터는 다른 제자들이 더욱 나와 다정해질 수 있었는데…….”라고 울면서 탄식했다. 안회의 품성은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그런 안회를 도식적인 설명의 이원 대립 구도 안에 밀어 넣는 것은 누가 봐도 위험 부담이 매우 큰 일이었다. 글의 응집력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번듯한 그릇>은 그러한 위기를 초지일관(初志一貫), 심리학적 관점을 내세워 돌파한다. 자공과 자로가 공자의 무의식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가를 먼저 설명함으로써 일정한 독자의 이해와 호응을 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안회의 이야기를 덧붙여 글의 응집력을 강화한다. ‘나’의 심리학적 식견이 절벽 위의 글쓰기를 끝까지 끌고 나간다. 마지막에 공자의 후계자가 증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안회, 자로, 자공과 관련지어 다시 부연함으로써 행여 있을 수도 있는 부지불식간의 ‘실족(失足)’을 미연에 방지한다. 이 모두 몸을 사리지 않고 투신(投身, 어떤 일에 몸을 던져 관계함)하는 글쓰기 태도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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