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Feb 18. 2019

마당이 있는 삶

추억의 공간, 마당

마당이 있는 삶     

저의 마지막 소원은 자그마한 ‘땅집’을 짓고 개와 고양이 한 마리씩 데리고 작은 화단이나 가꾸면서 느긋하게 사는 것입니다. 조금 더 욕심을 내면, 그 땅집을 2층으로 지어서 1층에는 작은 가게를 만들어서 직접 운영하거나 아니면 마음 맞는 젊은이(들)에게 ‘창업 장소’로 대여하고 저는 후견인 노릇이나 하면서 살고 싶습니다. 후원에는 평상이나 하나 놓아두고 집에서 기르는 어린 생명들과 함께 때때로 양광(陽光)이나 즐기면서 빈둥빈둥, 시간을 모르고 살고 싶습니다. 그렇게 죽기 사흘 전까지 물아일체, 모든 것을 잊고 살고 싶습니다(에디슨이 그 비슷한 말을 했답니다. 죽을 때까지 일에 몰두하겠다고요). 비가 와도 좋습니다. 비가 오면 원초적인 본향(本鄕)의 흙내음을 튕겨 올리는 그 힘찬 빗방울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있으니까요. 마당 깊은 집에 살던 어린 시절 그런 장면을 자주 봤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리 멀리 있는 꿈도 아닙니다. ‘미움받을 용기’만 있으면 내일부터라도 당장 일을 벌일 수 있습니다. 봐 둔 땅도 있고 돈 잘 빌려주는 거래 은행도 있습니다. 오직 ‘미움받을 용기’ 하나가 없습니다. 용기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릴 때 뛰어놀던 마당 깊은 집도 그래서 자주 떠올립니다. 주인집은 따로 있고 세입자들만 옹기종기 모여 살던, 골목길 아래로 가로로 길게 내려앉은 초가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넓은 마당의 끝자락, 앞집과 경계를 이루는 담 한쪽 모퉁이에 한 움큼의 채송화 씨를 뿌리곤 했습니다. 가난에 절어 살던 그 시절에 종묘상에서 우정 꽃씨를 사서 뿌리던 서른대여섯 살의 어머니가 참 궁금합니다. 명절이라 마침 친정에 내려온 딸아이의 나이가 그때의 어머니 나이를 닮았군요. 아마 외모도 꽤나 많이 닮았을 겁니다.      

문득, ‘마당이 뭐지?’라는 의문이 듭니다. 마침 마당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이 있습니다. 정효구 교수의 『마당 이야기』(작가정신, 2008)라는 책입니다. 우선 서두에 실려있는 음성학적 고찰부터 옮겨 보겠습니다. 오행설(五行說), 혹은 오덕 종시설(五德終始說, 고대 중국인들이 우주의 조직과 변천 원리를 이해한 형이상학적 사상 체계)에 입각한 설명이 꽤나 재미집니다. 

     

...‘마당’이라고 소리 내어 보다 : ‘마당’이라고 소리 내어 본다. 말소리의 뼈대를 이루는 두 개의 모음, 곧 ‘아’와 ‘아’가 이어지는 바람에 이 말이 내놓는 기운은 상당히 밝다. ‘마’의 ‘아’와, ‘당’의 ‘아’가 모두 양성모음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해보자. 그것은 ‘마’ 속에 들어있는 ‘아’와, ‘당’ 속에 들어있는 ‘아’가 모두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의 목성(木性) 소리에 속해서다.

세종대왕은 한글의 모음과 자음을 모두 음양오행의 원리에 맞추어 창제하였다고 한다. 양성모음 가운데 ‘아’가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동쪽의 목성 소리라면, ‘오’는 태양이 중천에 떠오른 모습을 그려 보인 남쪽의 화성(火性) 소리이다. 그런가 하면 음성모음에 해당되는 ‘어’는 태양이 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본뜬 서쪽의 금성(金性) 소리이며, ‘우’는 태양이 서쪽의 지평선(또는 수평선) 아래로 깊이 넘어간 모습을 그린 북쪽의 어두운 수성(水性) 소리이다. <중략>

그래서 마당이라는 말은 언제 소리 내어 보아도 밝은 기운을 뿜어낸다. 길을 가다가 혼자서 조용히 입속말로 발음해보아도, 마당이 그리워서 크게 밖을 향해 외쳐보아도, 마당이라는 말 자체의 양성(陽性)은 늘 변함이 없다. 양성이라는 한자말은 매력적이다. 그 말속엔 태양의 기운이라는 뜻이 내장돼 있다. 그러니까 일심(日心)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정효구, 『마당 이야기』 중에서] 

    

‘마당’은 본디 밝은 기운이 넘치는 곳인데, 그 이름의 소리값에도 그런 기운, 양성(陽性)이 넘친다는 설명입니다. 머덩이나 무둥, 아니면 므등이나 미딩으로 소리내는 것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누가 들어도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는 설명입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설명’과 따로 노는 ‘경험’이 있습니다. 앞에서 젊은 어머니의 채송화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습니다만, 저의 유년기 기억 속에서의 ‘마당’은 늘 쓸쓸하고 눅눅한 공간으로 그려집니다. 대문간에서 성큼 내려 딛고 들어서야 했던, 가난의 길목으로 ‘가라앉아 있던’ 마당, 예쁘지 않게 거무튀튀한 바탕색 흙을 지녔던 마당, 어른 팔뚝만 한 쥐가 쏜살같이 가로지르던 마당, 수업 준비물을 살 돈을 얻지 못해 눈물자국을 지우지도 못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마당, 다섯인지 여섯인지, 옹기종기 모여 살던 세입자들의 온갖 시름과 걱정 소리를 못 들은 척 서로 모른 채, 그저 묵묵하기만 했던 마당,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철 따라 피고 지던 채송화와 맨드라미와 해바라기들의 향연, 그런 ‘쓸쓸한 것들’로 점철된 마당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마당을 그리워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마당’은 그런 ‘쓸쓸하고 눅눅했던’ 유년기의 기억에 대한 어떤 ‘반동 형성’과 연관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당 이야기』라는 책의 저자도 못내(?) 그런 저의 심중을 헤아리시는 것 같습니다. ‘밝은 기운이 넘치는’ 마당을 강조하다가 글의 말미에서 짐짓 비보(裨補)를 도모합니다. 글의 행보를 조절합니다. 일종의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마당은 밝기만 하다고 해서 마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의 근원이 튼실함에 있듯이, 마당의 환한 기운이 영속적으로 은은하게 살아나기 위해서는 뿌리인 아랫도리의 음적(陰的) 깊이와 중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갖고 이제 ‘마당’이라고 다시 발음해보자. 그러면 여러분도 나도, 마당의 ‘당’자 맨 아래쪽에서 힘 있게 실체를 존재의 뿌리 쪽으로 끌어당기는 종성인 ‘ㅇ’의 중력, 아니 위력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종성인 이 ‘ㅇ’은 자음 가운데서 가장 심오하고 저력이 있는 소리이다. 그것은 목구멍소리로서 북방의 수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수성은 겨울의 속성을 지닌다. 그곳으로 모든 존재는 귀환하여 수장(收藏)되고 그 수장을 통하여 다시 삶 쪽으로 방향을 튼다. 이런 수성의 겨울은 지표면 아래쪽의, 보이지는 않지만 강력한 지하 세상인 것이다. 

‘마당’이란 말은 바로 이 ‘당’ 자의 종성인 ‘ㅇ’이 있음으로써 완성된다. 중력으로 잡아당기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한 존재가 부평초나 부석(浮石)과 같이 뿌리 없는 소멸과 방황을 하지 않도록 근원적으로 잡아주는 이 힘이 있음으로써, 마당은 그 위에서 마음 놓고 환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환함의 힘으로 우리를 불러들일 수 있는 것이다. [정효구, 위의 책]


사족 한 마디. 평생 동안, 저만의 ‘마당’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제 이름으로 등기된 땅이 여태 단 한 평도 없었다는 겁니다(아파트의 대지 지분은 있습니다만). 갈아먹을 용도든 짐승을 놓아기르기 위한 용도든, 제가 필요해서 제 스스로 가져본 땅은 여태 단 한 평도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발 디딜 땅 한 평도 없이 한 평생을 무사히(?) 살아온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실향민의 후예라 어디 낙향할 곳도 없는 처지, 굳이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서 조만간에 땅집이나 한 채 마련하는 걸로 본격적인 노후대책의 첫걸음을 떼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마당 가장자리에 채송화도 좀 심고요.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 인문학 10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