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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4. 2019

아버지와 딸, 서편제

‘못난 아버지의 아들과 딸’들이 한 마음으로 통곡하게 만든 불후의 명작

아버지와 딸서편제  

   

영화 <서편제>(임권택, 1993)의 원작은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선학동 나그네」(일부분)이다.  「선학동 나그네」는 나중에 <천년학>(임권택, 2006)으로 다시 또 영화로 만들어지지만 <서편제> 만큼의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보다 원작에 충실하려고 했고 장흥 땅의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썼지만, 정성을 쏟아부은 만큼의 보상은 받지 못했다. <서편제>는 좀 특별한 케이스다. 이를테면 ‘법(法)보다 때(時)가 앞섰던’ 시절의 산물이었다. 문민정부의 출범과 맞물려서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제비 몰러 나간다~”와 같은 판소리 투의 유행했던 광고 문구가 말해주듯 전통 존중의 풍조와 ‘사필귀정(事必歸正)’에 대한 국민적 바람이 그야말로 태풍처럼 몰아치던 때였다. 그 시대의 베스트셀러가 『일본은 없다』였다는 것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또 있다. <서편제>를 흥행시킨 그 시절의 또 하나(드러내 놓고 떠들지는 않았으나)의 중요한 시대적 아우라가 있었다. ‘못난 아버지를 만나 (가족을 위해) 희생할 수밖에 없었던 딸들’에 대한 동병상련과 연민의 정이었다. 이제 성년이 되어 사회의 주축이 된 그 ‘못난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아들과 딸들이 객석을 꽉꽉 채웠다. <서편제>는 시대적 아우라 속에서 피어난 당대의 연꽃이었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아니라 염화시중의 눈물이었다. 모든 ‘못난 아버지의 아들과 딸’들이 한 마음으로 통곡하게 만든 불후의 명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서편제>는 임권택 판 <심청가>라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살점과 뼈대의 배후에는 <심청가>라는 우리 민족 특유의 유전자가 있었다. 그 유전자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자.     

‘사람의 몸’은 언제나 최후의 수단이다. 먼저 마음이나 재물로 정성을 다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 ‘사람의 몸’을 바친다. 에밀레종 설화나 『심청전』에 나오는 희생공양(犧牲供養)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대종(大鐘)을 만들 수 없고, 서해안(백령도 근처)의 격한 풍랑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그럴 때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사람의 몸을 바치는 것, 바로 ‘인신(人身) 공희’다. 인간의 온갖 노력이 닿을 수 없는 그 ‘신비의 심연(深淵)’에 사람의 몸을 하나 던진다. 가장 중한 제물을 갖다 바친다. 인간 세상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서 작은 인간 세계 하나를 희생하는 것이다. 치성을 드려 낳은 자기 아이를 펄펄 끓는 쇳물 안에 던져 넣거나 가난한 집 처녀를 ‘공양미 삼백석’에 사서 바닷물에 수장(水葬)시킨다( 희생물들은 권력, 권위의 최상층부에 속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면 인간의 의지가 미치지 못하는 그 ‘신비의 심연’ 쪽에서 모종의 화답이 온다. 지금까지 만들어보지 못한 큰 종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고,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항해하는 배들이 풍랑을 만나 바다로 가라앉는 일도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거기까지는, 믿거나 말거나,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갖다 바치는 일을 통해 ‘미래의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들의 절박한 심리상태가 만들어내는 상황이다.   

  

그러나, 『심청전』의 주인공 심청이는 조금 다르다. 그녀는 그저 범박하게 ‘효(孝)의 화신’으로 자리매김될 인물이 아니다. 그녀가 효녀의 표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스스로 희생제물을 자청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도, 본인이 제 스스로 그 자리를 찾아갔다는 것을 높이 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심청이의 ‘희생물 자청(自請)’을 그렇게 ‘효행 사상’을 선양하는 데에만 활용하는 것은 권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 부분은 조금 더 확대(확장)될 필요가 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런저런 ‘다른 길’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 길을 우정 찾아간다. 부잣집(장승상댁)에 양녀로 들어가는 길도 있었고(그 정도의 재물은 아버지에게 안길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정도 총명한 아이라면 어떻게든 아버지와 함께 호구지책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친다. 그 부분에서 그녀의 한은 그 ‘아버지의 눈먼 자로서의 한’과 합치된다. 드러나 심청의 희생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과정을 지연시키는 가운데 아버지의 한(눈먼 자로서의 한)에다가 세상의 온갖 불평등을 합체(合體)시킨다. 아버지의 눈이 떠지는 날 온갖 한들이 다 소멸되고 세상이 확 뒤집어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물론 독자(관객)들을 심청이 이야기에 몰입시켜서 얻어내는 효과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 ‘세상 뒤집기의 염원’에 ‘심청의 몸’이 희생제물로 사용된 것이다. 물론, 심청의 희생은 효험을 낳는다. 심청이의 혁명 정신은 적중한다. 믿거나 말거나, 심청이는 부활했고, 황후가 되었고, 아버지는 눈을 떴고, 세상은 뒤집어진다. 공양미 삼백석 정도가 불전(佛殿)에서 얻어낼 수 있는 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가 내려온다. 제 아비 한 사람의 눈만 뜨게 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박해받던 모든 대중들에게 희망이라는 큰 무기(세상을 바꾸는데 쓸) 선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심청이는 희생 제물이 아니다. 본인 스스로가 제주(祭主)가 되어 큰 굿판을 한 번 벌인 큰무당이다. 심청이는 ‘제왕의 권위’를 지닌 큰무당이었다. 겉으로는 ‘눈먼’ 아버지가 믿었던 ‘공양미 삼백석’의 효험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자기 몸을 던져서 세상을 한 번 크게 뒤집어엎는 큰무당의 도래를 꿈꾸는 이야기다. 심청이는 대중들의 소망을 담아서 스스로 천지 조물주(서해 용왕)에게 ‘사람의 몸’으로 담판을 짓는 큰무당이었다. 심청이가 한 일은 치성(致誠)이 아니라 담판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투신은 우주의 질서를(현재는 잘못된 질서) 제 자리로 돌려놓는 ‘제왕의 죽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심청이의 투신(投身)이 치성이 아니라 담판이라는 것은 심청가 <범피중류> 대목의 그 장엄함만 보더라도(듣더라도) 단박에 알 수 있는 일이다. 잘못된 우주의 질서를 바로 잡으러 나가는 큰무당의 엄숙 장엄 함은 모든 듣는 이의 몸에 전율을 심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에서는 사람은 물론이고 모든 산천초목까지 울음으로 자신을 비워내게 만든다. 혼을 뺀다. 이제 봉사 심학규가 눈을 뜨는 일은 그저 한갓 잡사(雜事)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세상이 뒤집어지는 일, 도저히 불가능했던 일들이 가능해지는 세상이 온다. 당달봉사 심학규의 눈은 세상이 뒤집어진 다음에야 세상을 볼 수 있다. 세속적인 인간들의 눈은 언제나 세상이 뒤집어져야만 번쩍 뜨이는 법이다. 그래서 인당수는 고작 돈이나 대는 중국 상인들의 제단이 아니라 우리 민초들의 제단, 큰무당 심청이의 제단, 세상을 뒤집어엎는 ‘제왕의 제단’이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효는 반드시 집단이 의도적으로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도덕규범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누미노제를 가진 신성한 존재에 대한 원초적 경외의 태도, 즉 일종의 종교적 헌신이라는 원형적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집단적 도덕규범이다. 그래서 그 깊은 곳에는 집단적 무의식의 정동이 흐르고 있다. 또한 심청은 결코 세속적인 ‘효녀’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버지의 요청대로 몸 판 돈을 도로 물리고 아버지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인당수로 향한다. 여기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적인 인정과 의존을 넘은, 보다 큰 원칙에 자기를 맡기고 보다 큰 사명에 봉사하려는 비장한 각오가 엿보인다. 그것은 오직 천상의 신에 봉사하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부영, 『아니마와 아니무스』, 중에서]  

    

거듭 강조하지만, <심청가>의 노른자위가 바로 그 ‘제단’ 묘사 부분, 심청이가 물에 빠지는 대목과 그 전후라는 것, 그리고 그 대목에서 모두 일심동체(一心同體), 하나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는 것은 심청이가 단순한 희생제물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심청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심청이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한 번 이 세상을 바꾸어 놓고 싶었던 민초들의 깊은 속마음들이 인간으로 화한 존재였다. 가진 건 ‘사람의 몸’ 하나밖에 없었던 민초들이 자신을 던져서 어떻게든 세상을 한 번 바꾸고 싶었던 것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어이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놓고 서로를 부여잡고 울었던 것이다. 

    

사족 한 마디 :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기 몸을 바닷물에 던지는 행위를 두고 그것이 과연 진정한 효행(孝行)이었던가를 아이들에게 묻는 것은 그러므로 우둔한(악의적인) 질문이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코드(효행 사상)가 심미적 코드(예술품)에 기생할 때에는 비논리성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보통은 극단화된 서사가 동반한다)을 모르거나 무시한 질문이다. 그런 질문은 예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심청이의 존재성 자체를 몰각시켜서 ‘세상의 변화’ 자체를 선제적으로 봉쇄하려는 모종의 ‘나쁜 이데올로기’를 지니고 있을 수가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심청이는 이 세상의 질서를 크게 한 번 바꾸어 보려는 꿈을 가지고 스스로 제주(祭主)가 되어 자기 몸을 희생제물로 바친 큰무당이었다. 그의 굿은 그렇게 해서 크게 세상을 쇄신했다. 지금도 그녀의 ‘큰 굿판’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게 크게 한 번 죽어서 세상을 구했던 모범이, 눈먼 아비의 눈을 뜨게 한 기적이, 지금껏 엄연히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서편제>도 바로 그 기억의 일환이다. 심학규가 유봉이로 바뀌고 눈먼 자가 아비에서 딸로 바뀌어도 사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의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염원이 엄연한 이상 심청이의 ‘큰 굿판’은 언제 어디서고, 그때그때 시의에 맞는 제주를 불러내어, 재연(再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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