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선규 Mar 26. 2019

수레가 아무리 커도

주역, 화천대유

수레가 아무리 커도     

언젠가 우연히 지체 높은 분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벽에 걸린 아주 큰 편액을 하나 봤습니다. 너무 커서 일단 보는 이를 압도했습니다. 그 압도감(?)이 우선 신선했습니다. 그쪽 벽에서는 그것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거이재 임중이불위’(大車以載 任重而不危)라는 글귀가 들어 있었습니다. “큰 수레에 실었으니 무거운 임무를 맡았으나 위태하지는 않다”라는 뜻이라 했습니다. 그것을 처음 본 순간, “결과론적으로 볼 때, 높은 자리에 오른 이들은 모두 큰 수레(大車)가 맞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큰 수레가 아니면 이것저것, 똥이든 거름이든, 가리지 않고 다 실을 수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군자(君子)입니다.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땅 중에 솟은 산’이 될 수 있습니다(다음 장, ‘끝까지 마쳐야’ 참조). 그 말의 출전을 오늘 읽습니다. 주역 열네 번째 괘, ‘화천대유’(火天大有), 대유괘입니다. 크게 형통하는 괘입니다.  

   

「단전」에서 말하기를, 대유는 부드러운 것이 존위를 얻고 크게 가운데가 되어 위와 아래가 응하기 때문에 대유라 하니, 그 덕이 강건하여 문명하고 하늘에 응하여 때에 맞춰 행하는지라, 이로써 크게 형통하니라.

「상전」에서 말하기를, 불이 하늘 위에 있는 것이 대유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악을 막고 선을 선양해서 하늘을 따라 (만물의) 성명(性命)을 아름답게 이루니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32~133쪽]     


주역의 ‘화천대유’는 ‘악을 막고 선을 선양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힘으로 무엇인가를 누른다는 의미가 강해 평소 ‘유(柔)’와 ‘중(中)’을 강조해 온 주역의 화법에서 볼 때는 다소 ‘강(剛)’하다는 느낌을 줍니다만 ‘악을 막고 선을 선양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한 자 한 자가 울림이 있았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누구나 이 ‘화천대유’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 ‘화천대유’에 아주 깜찍한 ‘복병’이 숨어있었습니다. 그걸 오늘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큰 수레(大車)’는 그냥 큰 수레인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비유가 아니라 직서(直敍)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울림이 크다’며 승복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은근히 그 구절을 비웃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 구절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습니다. ‘큰 수레’를 ‘빈 깡통’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큰 수레에 짐을 실으니 먼 길을 가도 위태하지 않다’라는 글귀를 ‘빈 수레가 요란하여 얼마 가지 않아 바퀴살이 부러질 것이다’로, 밑도 끝도 없는 심술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개인적으로 그럴만한 사연이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자세한 사정은 약하겠습니다). 그 글귀가 주역에 나오는 말이라는 걸 알고서도 막무가내, 그런 염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급기야는 주역 역시 그런 빈 깡통들이 좋아하는 ‘오래된 빈 깡통 모음’이지 않겠는가라는 망발까지 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니란 걸 새삼 알겠습니다. 주역은 역시 주역이었습니다.     

구이(九二)는 큰 수레로써 실음이니 갈 바를 두어 허물이 없느니라. - 강건하지만 중용을 어기지 아니하였으니 오효에 의해 신임을 받는다. 임무가 무거우나 위태롭지 아니하고, 갈 길이 멀지만 막히지 아니하므로 갈 만하며 허물은 없다.

「상전」에서 말하기를, ‘대거이재(大車以載)’는 가운데에 쌓아서 실패하지 않음이라.(상왈 대거이재 적중불패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34~135쪽]  

   

복병은 ‘적중불패’(積中不敗)였습니다. 수레가 아무리 커도 가운데 싣지 않으면 실패한다는 것, ‘큰 수레’는 외견상으로, 적재량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짐을 가운데 실어 위태롭지 않은 수레가 ‘큰 수레’였습니다. 그게 주역의 언어, 주역의 화법이었습니다. 그걸 알 리 없었던 저로서는 그저 생각의 빈 깡통만 두드리고 다녔던 것입니다. ‘대거이재(大車以載)’를 바로 알았다면 ‘큰 수레’를 ‘빈 깡통’으로 읽는 어이없는 실수 같은 것은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 저의 삶이 ‘끝이 허무한’ 모양새를 보인 것도(‘君子有終’이지 못했던 것도) 결국은 그런 무식과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그 글귀만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깜량만 되었어도 그렇게 ‘적중(積中)’에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정(人情)을 도외시하고 ‘악을 막고 선을 선양하는’ 자기 생각에만 골몰해서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화천’은 항상 ‘유(柔)’와 ‘중(中)’과 함께 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습니다. 사냥터에서는 한 쪽을 터서 품으로 뛰어드는 짐승은 살려주어야 했습니다. 주역에서 말하는 ‘삼구(三驅)의 예’를 취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끝을 열어둘 생각은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끝을 보려 했습니다. 그렇게 빈 깡통으로, 빈 수레로 살아왔습니다. 모든 것이 어질러진 뒤에, 이제 와서 주역이 제대로 가르쳐 주네요. ‘대거이재(大車以載)’는 다름 아닌 ‘적중불패’(積中不敗)라고요. 정말이지 유구무언, 할 말이 없습니다.

<2015. 3. 26. 오늘 아침 일부 수정>               

작가의 이전글 아난의 돌다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