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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Mar 27. 2019

끝까지 마치는 것의 소중함

주역, 지산겸

끝까지 마치는 것의 소중함   

  

한때 명퇴(名退)를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여럿 있겠습니다만, 가장 큰 것은 갑자기 폐렴에 걸려 본의 아니게 얼핏 볼 수 있었던 ‘삶의 끝부분’ 탓이었습니다. 온몸에 통증이 오고 열흘 남짓 아무 것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탈진상태를 경험하면서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끝’이 저만치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심리적으로도 일종의 멘탈 붕괴(崩壞) 현상이 닥쳤습니다(무엇보다도 그게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다행히 고비를 넘기고 회복은 했습니다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합니다. 평소 저와는 농담을 즐기지 않는 주치의 선생님도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했다”라는 말씀을 공공연히 하실 정도니 저만의 엄살은 아니겠죠? 의원급 병원을 두 군데 거쳐서 대학병원 호흡기센터에 가서야 최종적으로 완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을 거치면서 이제 건강이나 챙기면서 조용히 일생을 정리하고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주위에서 반대하는 이가 많아서 지금은 주저앉은 상태입니다만 그때의 심정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경험 탓인지, 주역에서 강조하는 ‘끝까지 마치기’가 유난히 심금을 울립니다. 주역에서는 ‘군자유종’(君子有終)이 삶의 최종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타이릅니다. 마음에 새겨야 될 말씀입니다. 좋은 끝,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가급적이면 이해를 다투는 세상사에 관여하지 말고 ‘죽을 때 후회되지 않을 일들’만 고르고 골라서 신중하게 처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힘닿는 대로 남 도울 일을 찾고, 가르치는 제자들에게는 좀 더 살갑게, 성의 있게 대하고, 누구나 읽을 만한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가외로 하나 더 추가하자면 후학이나 후손 중에서 부지불식간에 ‘나쁜 물’에 감염된 사람이 있으면 거기서 나오도록 권면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처음에는 꽤 반듯한 이였는데 흙탕물에서 몇 년 뒹굴더니 보기에 딱할 정도로 ‘나쁜 물’이 드는 경우를 간혹 봅니다. ‘나쁜 물’이 더 깊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때로는 싫은 소리도 아끼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릇되게 살지 않는다면 그들도 나중에 선배가 되어 저를 이해할 것이라 여깁니다. 그렇게 또 나서다가 군자유종을 어디서 찾겠나 싶기도 합니다만, 어차피 ‘유(柔)’와 ‘중(中)’ 은 제 소관이 아닌 것 같습니다. 타고나기를 그렇게 나고 났으니까요. 주역에서 강조하는 ‘겸(謙)’은 더더욱 아닐 거고요.     


겸(謙)은 형통하니 군자가 (자신의 지위를 끝까지) 마치니라. (謙亨君子有終)   

  

「단전」에서 말하기를, 겸손이 형통한 것은 천도(天道)가 아래로 건너서 광명하고 지도(地道)가 낮은 데에서 위로 행함이라, 천도는 가득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여 겸손한 데에 더하고, 지도는 가득찬 것을 바꿔서 겸손한 데로 흐르며, 귀신은 가득찬 것을 해쳐서 겸손한 데에 복을 주고, 인도는 찬 것을 미워하며 겸손한 것을 좋아하니(人道惡盈而好謙), 겸은 높아도 빛나고 낮아도 넘을 수 없으니 군자의 마침이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139쪽]     


주역 열다섯 번째 괘는 ‘지산겸’(地山謙), 겸괘입니다. ‘땅 가운데 산이 있는’ 형상으로 ‘군자가 이를 본받아 많은 데를 덜어 적은 데에 더하여 사물을 알맞게 하는’ 덕을 강조합니다. 구삼(九三)을 제외하고는 다 음효입니다. ‘단전’의 해설이 재미있습니다. 천도, 지도, 귀신, 인도가 각각 가득찬 것(盈)을 훼손하고, 변케 하고, 해하고, 미워해서 겸(謙)을 돕는다는 표현이 과연 주역답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미워하는 일’일 뿐이니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실소를 금할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존경하는 선배님 한 분과 오랜만에 조우한 적이 있습니다. 반갑게 맞아주셔서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선배가 한때 ‘밖에 뜻을 두고’ 있을 때 제가 도와드리지 못한 것이 늘 송구스러운 처집니다. 그 선배는 누가 봐도 ‘겸(謙)’하여 ‘인덕 있는 자’로 인도(人道)의 인정을 득할 수 있었는데도 그 나머지 것들(천, 지, 귀)의 직무유기(?)로 땅위에 솟은 높은 산이 되지 못했습니다. ‘사물을 알맞게 하고 덕을 고르게 베풀’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두고 두고 아쉬운 대목입니다. 주역에서 천도, 지도, 귀신을 들어 인도의 앞에 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겸(謙)하면 그렇게 다 돕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선배를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아서 천도무친(天道無親)을 실감하는 중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천, 지, 귀의 직무유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 ‘나쁜 물’이 잔뜩 든 세상에서는 그것들과 거리를 둘 수 있도록 ‘가득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변케 하고, 해치고, 미워하는’ 게 진정으로 도와주는 일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선배가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 제가 그와 유사한 뜻을 전하며 사양했던 게 생각납니다. 그 선배 대신에 ‘지중산(地中山)’이 된 이가 겸(謙)하지 못한 모종의 처신으로 현재 세간의 비난의 대상이 되며 ‘군자유종(君子有終)’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라 더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유종(有終)’은 그야말로 죽을 때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일인 것 같습니다. 지산겸!!

<2015. 3. 27. 오늘 아침 일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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